다락방 순장 노트 작성
* 필수입력항목
설교 본문
내가 존경하고 사모해 마지않는 길(Gill)박사께서, 예수 안에 있는 진리를 앎으로써 믿게 된 사실이, 바로 이상의 본문을 이용한 윌리암 월린씨의 설교에서 되어졌던 일임을 알게 되면, 이 교회 교우 여러분들은 더욱 흥미진진할 것입니다. 나는 어느 정도의 호기심을 가지고 이 구절에 대한 그의 해석을 주시했었습니다. 그리고 길박사 그 자신의 회심에 대한 약간의 시사도 발견하려고 어느 정도까지는 생각했었습니다마는, 그의 분명하고도 조직적인 설명에 의해, 내가 받은바 교훈이 비록 많지만, 나는 일체 그런 것들에 개의치 않고 오늘 제가 드릴 말씀에 전적으로 집중하려고 했었습니다. 원컨대 이 본문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부여된 하나님의 손에 든 수단이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를 용감하게 방어하고, 또 아주 분명하게 은혜의 교리를 설명하는 수단이 되어, 비록 오늘날에도 적어도 죤 길씨처럼 능력으로 말씀을 듣고, 자기의 영혼을 깨우치는 놀라운 영향력을 가지고 말씀을 받아들이는 분들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자, 하나님의 질문의 말씀이 온 무리 가운데에 울려 퍼질 때에,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이 비단 한 사람에 그치지 말고 많은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하는 바이며, 나아가서 하나님의 질문의 말씀이 귓전에 이를 때에 거기서 그치지 말고 마음속까지 파고 들어가서,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왔다가 사죄의 확신을 얻고, 평안히 돌아가는 사람들이 생기기를 아울러 기도하는 바입니다. 나는 구태여 이 본문을 다 해석해서 이런 질문이 나오게 된 환경을 전부 언급하지 아니해도 될 줄로 압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계속 범죄해 왔습니다. 죄가 죄인 안에서 일으키고 있는 마음의 멀어짐을 주시해 보십시오.
아담은 범죄한 이후 자기의 창조주를 찾아야만 했었습니다마는,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온 동산을 다니면서 자기의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외쳐야만 했었습니다마는 그렇게 외치지 아니했습니다.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내가 당신에게 범죄하였나이다.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당신이 만든 피조물이 당신 발 앞에 이렇게 쓰러져 당신 손의 자비를 구하나이다.
내 아버지여, 당신께서 나를 이 아름다운 동산에 두셨나이다. 나는 당신께서 먹지 말라고 당부하시던 그 과실, 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고 하시던 그 과실을 잘못되이 제멋대로 먹고 말았나이다.
보시오, 내 아버지시여, 이렇게 나는 죄를 범했나이다. 나는 자백하오니 나 같은 놈에게도 당신의 자비가 내려질 수 있을진대, 당신의 공의를 구하며 당신의 자비를 간구하나이다"라고 간청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을 피해 달아났습니다. 죄인은 하나님께 오지 아니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죄인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내 하나님, 당신은 어디 계시나이까?"가 아니라 "죄인아, 네가 어디 있느냐"가 은혜소리의 제일성이었습니다. 교만스러운 자유 의지가 많은 갖가지 교리를 다 만들어 내었건만, 아담 당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죄인이 먼저 자기의 하나님을 찾았다는 예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죄인을 찾으셔야만 했습니다. 양이 제 길을 잃었습니다. 그 양은 위대한 목자가 찾지 않고는 자기 양 우리에 들어올 재간이 결코 없습니다. 범죄는 인간이 하고, 가슴 아파하기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은 범죄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잘못된 범죄의식으로 느껴지게 되는 것도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가진 것도 없거니와 사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추잡한 것뿐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것, 의와 참된 거룩을 동경하게 되는 모든 것은 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갔음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자기를 만드신 분을 멀리 피하고, 그 분과 더불어 교제를 나누려 하지 아니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이 본문은 죄가 원인이 되어 생기는 어리석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죄가 인간을 바보로 만들었습니다. 인간은 전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지혜로웠으나, 지금은 뱀의 흔적이 인간의 성품 속을 한번 통과한 이래로, 인간은 참으로 철저하게도 바보가 되고 말았습니다. 발가벗은 죄를 무화과나무 잎으로 가리려고 했으니 이거야말로 바보가 아니겠습니까?
늘어진 나뭇가지 밑에서 전지하신 여호와를 피해 숨겠다고 했으니, 진실로 이거야말로 미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모든 곳에 충만하시고 어디나 거하시며, 지극히 높은 하늘에서부터 저 깊은 음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것이 도무지 없다는 사실을 아담은 몰랐던 것입니까?
그러나 아담은 너무도 무지하고 미련해서, 자기가 하나님을 피할 수 있거니 바라고, 또 동산의 나무를 은신처로 생각해서 하나님의 진노의 그 무서운 눈길을 피할 수 있거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 우리도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우리도 매일 우리의 첫 조상의 그 바보스러움을 얼마나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지 모른답니다. 우리는 양심에 떠오르는 죄도 숨겨놓고, 그렇게 한 것이 하나님으로부터도 숨겨놓은 것으로 생각하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추궁을 두려워하기보다, 인간의 안목을 더 두려워하고 있는 때가 있습니다. 죄는 은밀한 것이며, 사회의 법률과 관습을 침해하지는 아니했다는 것을 이유로, 우리는 범한 죄를 양심에 꺼려하지도 않고 그냥 잠자리로 가는데, 그래도 역시 우리에게는 검은 점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고도 사람이 그 죄를 보지 못했으니, 하나님도 그 죄를 인식하지 못한다라고 우리는 만족해하는 때가 있습니다.
오, 죄여, 죄 너는 지금까지 인간에게 "내가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139:7)라는 질문을 내도록 해 왔다. 그러면서도 죄 너는 "인간이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하나님이 계시고, 음부에 그 자리를 펼지라도 하나님이 거기 계신다"(시139:8)는 사실을 인간으로 하여금 잊어버리도록 조작해 왔으며, 또 인간이 "흑암이 정녕 나를 덮을지라도 밤도 낮처럼 그에게 환하게 비칠 것이라"(시139:11)는 이 엄연한 사실조차 인간으로 하여금 잊어버리도록 공작해 왔다. 바로 죄란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 봅시다. 하나님이 친히 아담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신 모습을 주시해 봅시다.
하나님은 천천히 지나시며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자를 죽이고 말겠다는 조급한 모습으로 오시지는 아니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바람 날개를 타고 오시지는 아니했으며, 칼집에서 예리한 칼을 빼내가지고 급하게 오신 것도 아니요, 다만 동산에 거니시며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오신 때가 "날이 서늘할 때"(창3:8)였습니다. 어두움의 그 음침함이 가뜩이나 범죄한 사람의 공포를 더하게 할지도 모를 죽음 같은 밤중에 찾아오시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타는 격노를 가지고 찾아왔을 것으로 아담이 혹시나 생각할까봐, 하나님은 대낮의 뜨거운 정오에 찾아오시지도 아니했습니다. 죄진 놈을 급하게 죽여 버리고자 생각되기 쉬울까봐, 하나님은 이른 아침에 찾아오시지도 아니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아담을 찾아오신 때는 하루가 끝나는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며 화내시기를 더디 하시고, 다만 크게 자비로우시기 때문입니다. 이 때는 태양이 에덴의 영광의 최후날을 비치는 때였습니다. 인간의 비참을 두고 이슬이 말없이 울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자비의 숨결을 지닌 부드러운 바람이 공포의 열띤 얼굴에 불어오던 때였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조용히 명상할 수 있도록 불어오던 때였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어두움 가운데서도 소망을 품을 수 있도록 하늘이 저녁의 등불들을 빛내 주던 때였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바로 이때야 죄인에게 나아오셨던 것입니다. 아담은 자기가 믿고 만났던 하나님, 지극히 아름다운 교제를 함께 나누던 하나님, 사람이 자기 친구와 이야기하듯 자기가 그토록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그 하나님을 피해 달아나려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게 된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시던 하나님의 소리를 듣게 된 것입니다.
아, 이 짧은 말 속에 두개의 진리가 들어있었습니다.
먼저 이 말은 아담을 읽어버림을 당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만일 잃어버림을 당하지 아니했더라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어디 있는가를 문의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잃어버리기까지는 그것을 찾으려하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자기의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소리입니다. 그것은 자기를 떠나 멀리 나간 아들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찾으시는 사랑하시는 양친의 부르짖음입니다. 비록 몇 말로 구성된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문장이지만, 이것은 우리의 잃어버린 상태의 교리를 그대로 품고 있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나님이 문의하실 때에 인간은 틀림없이 잃어버려진 것이 분명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친히 그가 어디 있느냐고 찾으실 때는, 여러분들이나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보다도 더 무서운 뜻에서 그가 잃어버려진 상태에 놓여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다음엔 여기에 또한 자비도 있습니다.("네가 어디 있느냐?"는 말이 내포하고 있는 두 번째 진리는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실 의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아니했다면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잃어버려진 상태 그대로 방채 두었을 것이며, 따라서 "네가 어디 있느냐?"고 아예 문의조차 하시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귀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찾지 않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는 이 짧은 세 마디 하나님의 말 속에는 복음적인 설교가 있습니다. 그 세 마디 말이 깊고 깊은 숲속의 빽빽한 곳까지 파고 들어가, 도망간 자의 얼얼한 귓전에까지 이를 때에 그것은 복음적인 설교임에 분명합니다. 여러분의 하나님은 여러분을 잃어버리기를 즐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찾으러 나아오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금 잃어버린 것을 찾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구하러 아들의 인격으로 찾아오신다는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귀한 말씀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류를 파멸시키려고 작정만 하셨다면, 하나님은 즉시에 청천벽력이라도 내려치사 나무들을 불태워버리고, 죄인의 유골을 하나님의 분노의 시야에 흩으시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리바람과 폭풍우 속으로 돌진해서 백향목과 석류나무를 뿌리 채 뒤뽑아 놓으시며, "응, 네가 여기 있었구나, 네 배반한 놈이지, 반역자, 네 벌을 받으렸다. 네 앞에 음부가 떨어지리니, 너는 영원히 음부에 삼킨바 되리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시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호하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조용한 음성으로 그가 어디 있는지 찾으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문의하셨던 질문은 다섯 가지 다른 면에서 사용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명한 의미로 그것을 뜻하였는지 우리는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그 모든 면에 다 뜻을 두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하신 말씀 안에는 그 밑에 함축되어 있는 한 위대한 깊이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 분명히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쓰는 말은 그것이 단 하나의 의미만 던져 주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마는, 하나님은 불과 몇 마디 말씀을 가지고 많은 진리를 가르칠 수 있는 방향으로 말씀하시는 방법을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많은 것으로 적은 것을 던져 주지만, 하나님은 적은 것으로 많은 것을 던져 주십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말을 많이 해도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이 흔히 인간 화술의 규칙입니다. 적은 몇 마디 말로도 많은 의미를 던져주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지니신 규칙입니다. 우리는 얇게 쳐서 만든 금조각을 주나, 하나님은 말씀하실 때에 아예 금덩어리를 던져 줍니다. 우리는 단지 보석찌끼를 사용하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마다 그 입술에서 진주를 떨어뜨립니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하나님의 말씀이 그토록 거룩함을 알기조차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처럼 그토록 넓고 무한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기조차 못할 것입니다.
Ⅰ.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하나님의 질문은 무딘 감각을 깨우치려는 목적으로 던진 것입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죄는 양심을 바보로 만듭니다. 죄는 정신을 해칩니다. 그리하여 범죄한 후, 인간은 자기가 범죄하지 아니했을 때보다도 자기의 위험을 이해하는 능력이 훨씬 뒤떨어지게 됩니다. 죄는 고통 없이 양심을 죽이는 독약입니다. 마비를 통해서 그렇게 합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죽습니다. 인간은 알프스 산에서 얼어 죽는 사람이 죽는 것처럼 잠자는 가운데서 죄로 인해 죽습니다. 사람들은 잠을 자고 또 자곤 합니다. 마침내 죽기까지 잠을 잡니다. 나중에 지옥에 가서야 고통 가운데서 잠을 깹니다. 인간에게 내린 은혜의 최초 역사 중 하나는 먼저 이 잠을 제거해서 혼수상태에서 인간을 깨우고 눈을 뜨게 하여, 자기가 당한 위험을 발견토록 만드는 작업올시다.
좋은 의사의 제1차적 행동은 우리의 육체에 신경을 쓰고 육체를 의식하는 일입니다. 우리 육체는 차고 죽어있으며 마비되어 있습니다. 좋은 의사는 이 몸에 일단 생명을 넣습니다. 그때 고통이 있겠지요. 그러나 바로 그 고통이 우리에겐 최초의 효과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문의하신 것은 아담으로 하여금 생각의 여지를 주고자 의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담도 어느 정도까지는 자기의 범죄로 인한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었습니다마는, 하나님의 그런 질문이 아담의 심령의 깊은 곳을 뒤흔들어, 자기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해 도망치는 수고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가를 알려 주게 되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이것은, 지금 네 자신을 보아라, 너는 지금 네 하나님 앞에서 발가벗은 자요, 낯선 객이 되어 네 창조주의 임재를 두려워하는 비참하고도 불완전한 피조물이 되지 아니했느냐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것은, 너는 완악한 마음, 반역적인 의지를 가지고 너의 고상한 상태에서 타락에 타락을 거듭해온 타락인이 아니냐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것은, 너는 잃어버림을 당했구나. 네 하나님에게도 잃어버림을 당했고, 행복에게도 잃어버림을 당하고, 평화에게 잃어버림을 당했고, 지금도 잃어버림을 당했고, 영원에서도 잃어버림을 당했구나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죄인이여,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제발 지성으로 토하는 이 말로 인해서 무감각하고 몰지각했던 죄인이라도, 스스로 그 문제에 답해보도록 충동을 받으시기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인간이여, 그대는 지금 어디 계십니까?
아니 오늘 아침 어디에 계십니까?
어디 내가 말해볼까요?
그럽시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양심이 여러분을 정죄하고 있는 그런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아직도 죄를 회개하지도 아니하고,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한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나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의 양심이 편하십니까?
양심이 언제나 평안하더냐 말입니다. 때로는 천둥소리가 들려올 때는 없습니까?
파숫군이 자기의 등불을 밝혀 여러분 영혼의 은밀한 곳을 두루 찾아 여러분의 허물을 발견해 내는 때는 없었습니까?
그때 여러분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양심이 하나님에 대한 관계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낚싯바늘인 양심은 오늘도 여러분의 입 안에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낚싯줄을 당기시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소멸하는 불 안에 들어 있습니다. 양심이 여러분을 기민하게 만들고 있음은 사실이지만, 여러분에겐 공의가 그대 빈약한 불완전한 양심보다도 더 엄중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여러분을 정죄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보다도 더 위대합니다. 하나님은 만사를 다 아십니다. 여러분의 양심이 여러분에게 일단 여러분이 잘못되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여러분들이야말로 얼마나 잘못된 사람들일까요?
그러나,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하나님과 낯선 사람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여러분들 가운데는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단지 야비한 언어에나, 또는 친구들과 대수롭지 않는 맹세 따위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경건하게 들었을지는 모르나, 진정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세원을 보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친구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먹고 마시는 것으로 족하다고 합니다. 세상은 온통 만족합니다. 세상의 덧없는 쾌락이 여러분의 심령을 만족시킵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께서 여기 계시는 것을 본다면 여러분은 천길만길 달아날 것입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하나님에게 원수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 이것이 피조물이 존재해야 하는 원래의 정당한 상태였을까요?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이 다시 여러분에게로 내려지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자기의 창조주를 무서워 벌벌 떨고 있는 이 가련한 상태가 진정 피조물이 꼭 처해야만 했던 상태일까요?
여러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임재를 마냥 즐기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뻐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여러분을 살려줄 바로 그 귀한 음식을 사랑하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병들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진실로 병이 들었군요!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진정 여러분이 계속 고집을 피우시면 여러분에게 화를 내시고 계심을 기억하시오. 그 많은 총들이 총구의 목표를 향해 있듯이 하나님의 계명들은 모두 오늘 아침 여러분을 겨누고 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님의 손가락이 끌어당기는 것만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계명들이 순식간에 여러분을 파멸해서 산산조각으로 내고 말 것입니다. 단두대에 목을 걸쳐놓고 그 머리에 날이 번쩍이는 도끼를 올려놓은 사람치고 편하다 할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여러분의 입장이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은 디오니시우스의 잔치에서 한 신하의 입장처럼, 한 가닥의 머리카락에 칼을 달아매어 그 머리 위에 올려놓은 것과 같아서 위기일발의 순간에 있습니다. 이미 선고는 내려졌습니다!
"하나님은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시7:11~12)라고 했습니다.
인간아, 네가 어디 있느냐?
오, 하나님이시여,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가 어디 있는지 알게 도와주시옵소서!
인간의 눈을 열어 주옵소서!
그 질문이 인간으로 깨우치게 하옵소서!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잠에서 깨게 해 주옵소서! 그리하여 인간이 잠을 깨어 자기가 어디에 있는가를 발견토록 해 주옵소서.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의 미움이 되어 있고, 하나님의 불타는 증오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토록 도와주옵소서!
"네가 어디 있느냐?"고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의 생애야말로 허약한 것입니다. 세상에 여러분의 생애보다 더 약한 것은 없습니다. 거미줄이라도 여러분 생애의 실과 비교하면 하나의 굵은 쇠줄입니다. 꿈이라하더라도 여러분 존재의 하찮은 구조에 비하면, 실질적인 하나의 석조건물이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기 있다가 떠나는 인생입니다. 비록 여러분이 오늘은 여기 앉아계십니다마는, 일주일이 가기도 전에 저 딴 세상에서 울부짖고 계시는 사람이 될지도 모릅니다.
오, 여러분은 어디에 계십니까?
용서받지 못한 채 계신다면 여러분은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올시다. 여러분은 정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저 무작정 파멸을 향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죄로 아직 덮혀져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여러분의 심판주의 무서운 심판대로 바쁘게 달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이미 잃어버려진 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매순간 독수리 날개를 타고서 장차 여러분이 영원히 멸망받고말 그곳을 향해 저렇게 속력을 내서 급하게 달리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를 안다는 사실이 과연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또 다른 경우를 봅시다. 사람이 병이 났을 경우 의사를 찾기만하면 자기의 상태를 알 것입니다마는 미련을 피우고 "평안하다 평안하다. 아무 이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의 사유재산이 전적으로 파산위험에 있는 것은 겁을 내어 밤낮 괴로워하면서도, 진작 우리의 불쌍하고 불쌍한 이 영혼에 대해서는 도무지 염려를 보내지 않고 있으니 답답한 일입니다.
우리들은 마치 어린아이들이 길거리에서 주워 놀다가 버리는, 쓸모없는 폐품 계산기나 깨어진 접시조각으로 알고, 우리들의 영혼을 가지고 장난을 하고 있는 판입니다!
죄인이여, 죄인이여, 그대가 아직도 잠을 깨지 못하고 달콤한 꿈속에 머물러 있음으로 인해서, 여러분의 영혼은 여러분이 잃어버려도 될 정도의 그토록 무가치한 광대의 지팡이처럼 가련한 대우를 받아야 한단 말입니까!
오, 한 형제의 마음이 그대의 마음을 움직일진대, 한 형제의 목소리가 여러분의 조는 눈을 깨울진대, 내 그대에게 말합니다.
"오, 잠자는 자여, 무엇이 그대를 괴롭히던가요? 일어나시오. 그대의 하나님에게 나가십시오. 잠을 깨우시오. 왜 주무시는 거요.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어서 깨어서 답을 하시오. 그대는 지금 잃어버려진 상태, 파멸된 상태, 불완전한 상태에 처해 있답니다.
오, 죄인이여, 그대는 과연 어디 있습니까?"
Ⅱ. 둘째로, 이 질문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백에 이르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담의 마음이 올바른 상태에 있었더라면 그는 자기의 죄를 온전히 자백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에 대해 옳게 자백했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를 우리가 하나님과 그리스도 밖에 있다고 할 경우,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해 오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봅시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나는 너를 나의 형상대로 만들었노라. 나는 너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만들었다. 나는 내손으로 만든 모든 것을 네게 주어 너로 통치토록 했다. 나는 네 발 앞에 모든 것을 갖다 주었다. 공중의 새, 바다의 고기, 바다 깊이 통과하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주었다. 나는 이 정원의 모든 좋은 것을 다 네게 주어 네 집이 되게 했다. 나는 나의 임재로 너를 존귀하게 했으며, 나는 너의 복지를 생각하고 너의 모든 소원을 앞서 능가해서 섭리했다. 밤에는 달이 너를 상치 않았으며, 낮에는 해가 너를 상치 아니했다. 나는 너를 위해 바람을 잠잠케 했으며, 너를 배불리 먹고 살찌도록 나무는 과실로 옷 입혔고, 만물이 너의 행복에 이바지하게 조처했었노라. 그런데 너는 지금 어디 있느냐?
내게 네게 부탁한 것은 조그마한 일 한 가지, 곧 내 자신을 위해 보유해 둔 나무에 접근하지 말라는 것뿐이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네가 지금 도둑의 방에 있느냐?
배반자의 방에 있느냐?
너는 범죄했느냐?
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자, 죄인된 자여, 이 말 좀 들어보시오.
"여러분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너에게 네 어린 시절에 너를 위해 울어줄 경건한 어머니를 주었다. 나는 너에게 너의 회심을 그토록 갈구하는 거룩한 아버지를 주었다. 나는 너에게 모든 섭리의 은사를 주어 너는 식사에 궁한 적도 없었다. 나는 너를 입혀주었다. 생활의 안정을 주었다. 나는 너를 병석에서 일으키고, 너의 그 수많은 어리석은 행동도 못 본채 보아 넘겼다. 나의 자비는 흐르는 강처럼 너에게 마냥 흘러갔노라. 내가 아침에 네 눈을 뜨게 한 것은 나의 선함을 보게 함이었다. 밤늦게까지 나는 너를 돕는 자였다. 나는 네 머리를 보호코자 휘장을 내리기도 했다. 나는 너를 내 깃털로 내 날개 아래 덮어 보호했건만, 너는 마땅히 의탁해야 하거늘 도대체 지금 어디 있느냐?
그런데 너는 나의 계명을 잊어버리고 나의 은덕을 싫어하고, 나의 율법을 파괴하며 내 아들을 거역하지 아니했더냐?
바로 오늘까지 너는 불신자가 되어 자기 자신의 행위를 믿을 뿐, 내 사랑하는 아들, 곧 온 세상의 구주가 완성한 의를 취하려고는 하지 않고 있지 않느냐?
너를 위해 그토록 큰일을 하신 주께 너는 지금까지 무엇을 해드렸느냐?
너는 어디에 있느냐?
너는 지금까지 하늘에서 떨어지는 감미로운 빗물은 다 마셔놓고도, 감사의 열매를 내지 못하는 저 불모지는 아니었던가?
아니, 너는 땅의 양분은 모두 빨아 먹고도 열매는 맺지 못하는 한 그루의 나무는 아니었던가?
너는 지금 어디 있느냐?
너는 오늘도 내 원수의 진영에 있지 아니했느냐?
너는 나를 부정하며, 또 너를 만들고 너의 코에 호흡을 지켜주시는 하나님, 곧 네 생명을 그 손 안에 두고 계시는 하나님, 너의 모든 길을 친히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엉뚱하게도 사단의 편에 서 있지 아니 했던가?
죄인이여, 너는 어디 있느냐?
너는 그토록 하나님의 모든 선하심을 맛보고도 아직도 죄인이로다!"
자,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이상과 같이 말하실 것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뱀은 당신이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아주 영광스럽게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담이여, 그렇게 되었는가?
과연 그렇게 되었는가요?
당신의 교만한 지식이 어디 있습니까?
명예가 어디 있습니까?
반역이 당신에게 안겨다 준 그 광대한 학식이 다 어디 있습니까?
천사의 옷을 입기는커녕 당신은 벌거숭이가 되었습니다. 영광은커녕 당신은 수치만 당했습니다. 높아지기는커녕 불명예만 안게 되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죄인이여, 바로 여러분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죄는 여러분에게 "내가 너에게 쾌락을 주겠노라"고 말합니다. 또 사실 여러분은 쾌락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쾌락에 뒤따라온 고통은 어떠했었습니까?
죄는 여러분에게 혼합된 술잔을 안겨다 주지만 충혈된 눈과 화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죄는 여러분에게 "내가 너를 위대하게 만들겠노라"고 말하지만, 죄가 여러분에게 해 준 것은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술 취한 자여, 그 술 취함이 여러분에게 해준 일이 기껏 무엇이던가요?
술 취함이 여러분에게 안겨다 준 것은 다 떨어진 누더기 옷에다가 빈털터리의 가난뿐이었습니다.
간음 자여, 음행 자여, 그대에게 생긴 일이 무엇입니까?
다만 그대의 육체는 에이즈 병이 들어버렸고 영혼은 고통으로 차 있을 뿐입니다.
도둑질한 자여, 사기한 자여, 그대에게 생긴 일은 무엇입니까?
그대는 다만 사람 눈앞에서 나쁜 놈이요, 불명예스러운 놈으로 낙인을 찍은 것뿐입니다.
남몰래 은밀히 죄를 짓고 있는 자여! 빛 좋은 개살구 같은 죄인이여! 도대체 그대에게 생긴 일이 무엇입니까?
그대의 쾌미는 신맛이 나고 그대의 모든 기쁨은 독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디 있습니까?
어느 경우나 죄는 거짓말쟁이로 행세해 왔습니다. 반역은 적절한 보응을 받지 않는 한 늘 예외 없이 거짓말쟁이로 행세할 것입니다. 죄인들은 자기들의 저지른 일로 꽉 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하신 것은 죄를 확신시키는 것 외에도, 그것은 "네가 어떻게 그런 자리에까지 오게 되었느냐?"라고 묻는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아담, 당신이 그 자리에까지 오게 된 것은 순전히 당신 자신에 의한 것입니다. 만일 아담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더라면 하와가 당신을 내동댕이치지는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와여, 주된 죄를 뱀에게만 돌릴 것이 아닙니다. 만일 당신 하와가 뱀에게 귀만 빌려주지 아니했더라면, 뱀은 당신이 귀머거리나 아닌지 먼저 이 사실부터 시험하기에 오랜 시간을 끌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죄인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친히 와있는 그곳에 그대로 있습니다. 여러분이 범죄했다는 사실은 여러분 자신의 과오이지 기타 누구의 과오도 아닙니다. 바로 곧 여러분 자신의 저지른 일입니다. 죄인으로 하여금 죄가 자기 자신의 소유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만든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우리가 가진 유일한 것은 단지 죄뿐입니다. 우리가 창조해낸 유일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죄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소유입니다. 내가 무엇이나 악한 것을 다 저지르게 되는 것은, 단지 나의 내부에서 나온 소생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악의 모든 기원은 내 자신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타락한 사람에 관해 이야기 하면,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를 모두 조상 아담에게로 돌릴 것입니다. 그들은 성품의 타락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변명의 여지가 반드시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치 그들은 성품의 타락이 인간의 절대적인 사악을 증명하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품의 타락이 죄가 인간 자신이 저지른 소생이며, 인간은 골수와 핏줄기 속에 죄를 푸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성품의 타락이 이상의 모든 사실을 말하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일진대 여하한 핑계할 방도는 없습니다. 우리가 죄인으로 살다가 죽어 가면 죄는 우리 문턱에 그대로 누워있을 뿐 다른 곳에 가지는 않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이 스스로 좋다고 택해서 지금의 자리에 처해 있으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동일한 절망적 상태에 의로 미련을 피우고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멀어진 거리를 두고 지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아침 하나님께서 죄인을 깨우치고, 그에게 죄를 깨닫게 하는 역사가 있기를 비는 바입니다. 졸고 있는 지겨운 침상에서 사람을 일으켜 세워 그 침상을 불태우게 하기보다는, 그냥 잠자고 있는 것을 깨우기는 더 쉬운 일입니다. 이것이 무엇보다 죄인이 먼저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가 이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잠을 깨서 자기가 잃어버려진 상태에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죄를 깨닫고 자기가 자기 자신을 파멸해 왔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과거 자기가 사랑하던 죄를 증오합니다. 그의 거짓된 피난처를 도망쳐 빠져 나옵니다. 자기가 즐기던 것을 버립니다. 그리고 마땅히 찾아야 할 곳에서 최후의 구원을 찾으려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최후의 구원을 추구합니다.
Ⅲ. 우리는 이 본문의 질문으로 세 번째 대목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디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하나님께서 인간의 잃어버림을 당한 상태를 슬퍼서 말하는 소리로 봅니다.
혹자는 히브리 본문을 과감하게 번역해서 "너에게 딱하도다 너에게 딱하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선지자의 말씀을 이야기하시는 것처럼, 다음과 같이 아담에게 이르시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너를 포기하더냐?
내가 어떻게 너를 전적으로 파멸하더냐?
내가 어떻게 너를 아드마(Admah)처럼 하더냐?
내가 어떻게 너를 스보임(Zeboim)처럼 하더냐?
나의 원망스러움이 너를 향해 불타고 내 창자가 너를 향해 움직이는구나. 나의 불쌍한 아담아, 너는 어디 있느냐?
너는 나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더니 이젠 나를 피해 달아났구나. 전에는 네가 행복하더니 지금은 어디 있느냐?
발가벗고,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이 되었구나. 너는 영광스럽고 불멸하며, 복스러운 나의 형상을 지녔는데, 불쌍한 아담아, 지금 너는 어디 있느냐?
나의 형상이 네 안에서 일그러졌고, 너의 아버지의 얼굴이 가셨으니, 너는 이제 너 자신을 흙으로 만들어 다만 감각적이며 마귀적 존재가 되고 말았구나.
오, 불쌍한 아담이여,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께서 불쌍한 아담을 어떻게 여기시고 계셨나를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입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떤 생각을 느끼시거나, 고통을 당하실 수 없다는 것이 모든 신학자들의 당연한 생각입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하나님이 인간의 타락에 대해 무엇을 느끼시고 고통을 당하셨다고 말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무것이나 또 무슨 일이든지 행하실 수가 없다고 말해버린다면, 그땐 우리는 하나님을 전능하시지 아니하셨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을 행하십니다. 우리는 목석같은 하나의 신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감정을 가지고 느끼시며, 또 자기 자신을 묘사하시되 아버지의 애끓는 창자를 지닌 인간의 언어로, 그리고 어머니의 부드러운 마음씨를 지닌 그런 언어로 묘사합니다. 아버지가 불효자식을 위해 슬피우시듯이, 영원하신 우리 아버지도 "불쌍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부르짖고 계십니다.
자, 오늘 아침 지금까지 드린 말씀으로 감동을 받아 어떤 역사가 벌어지고 있는 영혼이 있습니까?
나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잃어버린 상태에 놓여 있음을 느끼십니까?
여러분은 이런 상실된 상태에 있는 것이 여러분 자신의 고의적 바보스러운 어리석음의 결과임을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슬퍼하고 있습니까?
아, 여러분,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두고 슬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내려다보시고 "아, 불쌍한 이 술주정군아, 왜 너는 너의 술잔에 붙어 떨어질 줄 모르느냐? 도대체 너는 어떤 비극 속으로 자신을 몰고 갈 작정이냐?"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제 죄로 인해 울고 있는 여러분을 보시고 "오, 불쌍한 자여, 네가 좋아 행한 그 어리석음의 고통이 과연 어떠하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오장육부는 지금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에브라임을 자기 가슴에 포옹하기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죄인이여, 하나님은 냉정한 돌 같은 심정을 지니신 분으로 생각지는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완악한 것은 여러분 오장육부 속에나 있는 것이지 하나님 속에는 없습니다. 죄를 깨닫는 영혼!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인격으로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증거해 보이시며, 여러분을 위해 슬퍼하시면서 이렇게 외치십니다.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눅19:42)라고 말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23:37)라고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나는 이제도 듣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위해 기도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 슬픈 울부짖음이 여러분들의 귀속까지 파고 들어가 회개토록 되기를 기도하는 바입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18:32)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오, 여러분은 여러분의 죄와 또 그 죄가 여러분에게 갖다 준 그 비참함을 인해서 마음이 터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불쌍한 죄인이여, 여러분은 탕자처럼 이렇게 말하십시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눅15:18~19)라고 말입니다.
아버지는 여러분이 아직 저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도 죄인된 여러분을 보십니다. 아버지는 여러분을 보십니다.
여기 자비의 눈길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달려갔습니다.
여기 자비의 발길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여러분을 포옹합니다.
여기 자비의 팔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입을 맞추십니다.
여기 자비의 입술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누더기 옷을 벗으라"고 말하십니다.
여기 자비의 말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당신을 입히십니다.
여기 자비의 행위가 있습니다. 놀라운 자비올시다! 온통 자비의 덩어리올시다! 자비의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어떠한 환영을 베푸시는지 진정 여러분이 아신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더 이상 멀리 떠나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죤 번연이 말한 것처럼, 포위자가 검은 기를 내밀면,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싸워야 하는 것으로 말하고, 그가 흰 기를 쳐들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그들이 문을 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아니 하나님께서 그들의 성에 헌장을 준다고 할 때에, 그들은 "문을 홱 열어라"고 말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담을 넘어 하나님에게로 달려갔던 것입니다.
사단이 여러분에게 와서 하나님을 완고하며, 불친절하며, 여러분을 용서해 주시기를 즐겨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서 여러분을 속이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을 시험해 보아라! 하나님을 시험해 보아라! 라고 마귀는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바로 곧 추잡하며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을 때라도, 그리도 여러분은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을 한번 시험해보려는 충동을 느낀다하더라도, 그러나 여러분은 에덴동산의 나무사이를 울려 퍼지는 저 하나님의 사심 없는 소리 "아담아, 불쌍한 아담아, 내가 친히 만든 피조자여,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라는 말소리를 다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Ⅳ. 그러나 지금 나는 시간을 아껴 이 본문 구절이 의도했음에 틀림이 없었던 넷째 대지를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이 본문 구절의 말씀은 소생시키는 격려의 소리며, 죄를 깨닫게 하는 소리며, 인간의 상실상태를 슬퍼해하시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네 번째로는 그것은 사람을 찾으려는 소리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내가 너를 찾으러 왔노라. 네가 어디 있든지 하여간 찾으러 왔노라는 소리올시다. 내 사랑의 눈길이 너를 볼 때까지 나는 너를 찾겠다. 내 사랑의 손길이 너에게 미치기까지 나는 너를 좇겠다. 내가 너를 내 자신에게로 데리고 와서 너를 내 마음과 화해하기까지 나는 너를 계속 붙들겠다는 말씀입니다.
자, 여러분에게 지금까지 내가 말씀드린 설교의 앞부분의 세대지를 따라 여기까지 이르렀다면, 나는 여러분에게 확신을 가지고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격려를 받으셨다면, 여러분이 지금까지 지은 죄를 깨닫게 되셨다면, 여러분이 지금까지 하나님을 향해 간절한 바가 있다면, 이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찾으러 나오시사 오늘 아침 여러분을 찾고야 마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택하신 자를 찾으러 나오셔서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아시고 그들을 놓치지 않고 반드시 찾으신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비록 지금까지 두루 방황하고 다녔지만 하나님 곁에 있더라는 사실이야말로 얼마나 굉장한 생각이겠습니까?
그들은 음부의 문까지 내려가서 그 음부의 문이 그들을 받아들이려고 반쯤 열려있는 정도에까지 이르렀으니, 하나님께서 거기서도 그들을 이끌어 오신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도 범죄한 사람들이라 자기 자신들도 스스로를 포기해 버렸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도 이젠 그들을 또한 단념해 보린 나머지, 사단은 그들을 자기 계산속에 넣고 그들을 자기에게로 끌어 들이려고 채비를 다 갖추고 있다손 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으러 나오시사 그들을 찾아내시고, 결국 그들을 소유하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잃어버림을 당해 파멸의 죄인된 여러분이라도 하나님의 소리를 듣게 합니다.
하나님의 소리가 여러분에게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나는 너를 찾으러 왔노라고 말하십니다.
이제 하나님과 죄인의 일대일의 대화를 들어봅시다. 죄인 왈
"하나님이시여, 나는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행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나이다."
"그러니, 내가 너를 찾아와서 너를 위해 모든 것을 행하노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죄인 왈 "하나님이시여, 나는 지금 율법이 나를 위협하고 공의가 나를 미워하는 처지에 있나이다."
"그러니까, 내가 율법의 모든 공포를 해결하고 공의의 진노로 감당하기 위해 내가 왔노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또 죄인이 가라사대 "그러나, 하나님이시여, 나는 회개도 할 수 없는 처지에 있나이다"라고 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시기를 "그러니까, 내가 너를 찾으러 왔으며, 이젠 너에게 회개와 사죄를 주기 위해 높은 보좌에 올라갔노라"고 하십니다.
또 죄인 왈 "그러나 하나님이시여, 나는 당신을 믿을 수도 없고 또 만족하리만큼 믿을 수가 진정 없나이다."
"그러나, 나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자로다. 내가 너에게 믿음을 주러 왔노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죄인 왈 "그러나, 하나님이시여, 나는 내가 기도드려도 합당한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는 너를 위해 기도하며 너의 소원을 허락하러 왔노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죄인이 또 말하기를 "그러나, 하나님, 하나님도 내가 이토록 사악한 놈인 것은 모르실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은 "천만에 말씀이다. 나도 네가 그런 사람인지 안다." 내가 너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질문을 던진 것은 네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도록 함이었다. "나는 너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노라"고 하십니다.
또 죄인 왈 "그러나 하나님, 나는 죄인의 괴수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나의 죄만큼 그토록 악하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나 네가 비록 어디에 있든 나는 너를 구원하러 이렇게 왔노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죄인 왈 "그러나, 하나님 나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의 버림받은 자를 모으러 왔노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죄인 왈 "하나님, 나는 소망이 끊어질 정도로 범죄만 해 왔습니다."
"그랬지. 그러나 나는 소망없는 죄인에게 소망을 주러왔노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죄인 왈 "아닙니다. 나는 멸망받아야 마땅할 놈입니다."
그렇고말고, 그러나 나는 율법을 완성하고 그것을 영화롭게 하여, 네가 받을 벌을 그리스도 인격 안에 두어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은, 나의 사랑을 받도록 하기 위해 왔노라"고 말하십니다.
어느 죄인이든 자기의 상실상태를 의식하고 있는 죄인은 결국 그 자리에서 떠나게 마련입니다. 나는 최악의 경우, 최고의 불행을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우리는 마귀의 회당에서 높은 교육을 받아 죄악에 달통한 사람을 기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올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라도 죄인들을 위해 피 흘려주신 주님의 상처를 눈물어린 눈길로 보기만 한다면, 주님은 그들을 능히 구원하시사, 자기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로 갈 수 있는 최대의 경지로 이끌어 들이십니다.
오! 나는 오늘 아침 내 하고 싶은 원대로 실컷 다 설교할 수 없고, 여러분도 여러분 듣고 싶은 대로 실컷 다 들을 수 없음이 어쩔 수 없는 유감이올시다마는, 원컨대 하나님께서 내가 말씀할 수 없었던 부분을 다시 말씀해 주실 것을 바랄 뿐이며, 또 바라옵기는 하나님께서 여기 계시는 절망적인 죄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리라 믿습니다.
그것은 즉 "불쌍한 영혼아, 지금 내 때가 왔구나, 나는 너를 그 무서운 함정과 진흙투성이에서 빼내겠노라. 오늘, 아니 바로 이 시간에 나는 너의 발을 반석 위에 올려놓을 것이며, 네 입에 새 노래를 넣을 것이며, 너의 가는 길을 정하리라"고 말입니다. 참으로 그렇게 된다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이름이 복되고 복될 것입니다.
Ⅴ. 지금 끝으로 이 본문 말씀은 또 다른 한 의미로 사용되어질 수도 있으며 또 사용되어짐이 분명합니다. 이 본문을 감각을 깨우치고 죄를 확신시키는 소리를 거절하는 사람들과, 또 사람들을 사랑으로 측은해 하는 소리나, 또는 사람들을 찾으시는 선하심의 소리로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본문이 다른 방식으로 들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공의가 사람들을 무섭게 호출하는 소리입니다.
아담은 달아났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를 반드시 하나님의 몽둥이 곁으로 데리고 오시고야 맙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리 오라, 이리 와. 내가 너를 처벌해야 하겠다. 죄는 반드시 처벌당해야 한다. 이리 오라. 내가 너에게 문제를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너의 변명의 소리를 꼭 들어보아야 하겠다. 어디 들어보고 그 변명의 소리가 터무니없이 공허한 것일진대 유죄선고를 내릴 수밖에 없다."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 속에는 자비도 많이 있지만, 또한 엄중한 면도 많습니다. 그것은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여기 벌을 받으러 나오너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그와 같은 부르짖음은 듣지 않습니다. 자비롭게도 그런 엄중한 부르짖음이 좀 연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얼마 있지 않아 그런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엄중한 부르짖음을 처음으로 들을 때는 폭풍이 일기 시작할 때, 우뢰 소리의 울부짖음처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병들어 병석에 누워 죽음이 뼈 속을 관통해서 여러분을 응시하며, 여러분의 그 창백한 손길에 와서 닿으면서 "너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려므나"라고 말할 때, 여러분은 비로소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의 엄중함을 듣게 될 것입니다. 혹 여러분들은 그런 문제를 오늘 연기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문제를 이 다음에라도 반드시 다루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때는 하나님께서 오늘보다도 더 가까이 여러분 자신의 실존으로 나아오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뼈는 마치 삶아놓은 무우조각 같은 것이며, 여러분의 갈비뼈는 제대로 요동할 것이며, 여러분의 심장은 내부에서 마치 밀초처럼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질병의 고통과 씨름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질병의 고통보다 더 무서운 고통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죽음과 대면하지 않고는 지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마저도 여러분의 모든 공포 가운에 최고의 공포는 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그 죽음을 넘어선 저 건너편의 심판과 파멸을 보게 되겠기 때문입니다. 그때 가면 여러분은 조용한 방에서도, 아내와 어린 자녀의 음성도 들리지 않는 고요 속에서도 그 소리를 들으실 것입니다. 오직 시계의 똑딱거리는 소리에서도 여러분은 여러분 생애의 최후 황혼의 순간에, 여러분을 향해 오고 계시는 하나님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실 것이며,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하시는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이제 너는 나를 만나야 하리라. 너 허리를 동이라! 너에겐 이제 더 이상의 자비의 초청은 없다. 네가 누릴 자비의 날은 지나갔다. 이젠 목사의 경고의 소리도 없다. 이제 너는 별수 없이 나와 맞대면하자"하고 말하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그렇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신경은 밟고 밟아도 아무런 반응도 없는 길바닥처럼 무디게 되었으며, 여러분의 그 왕성하던 정력도 사라지고 말았으며, 이제 여러분은 타버리고 있는 촛불처럼 오직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디 지금이라도 자랑하거나 뽐내 봅시다요?
여러분의 맹세는 어디로 갔습니까?
지금 여러분이 즐기던 잔치와 호언장담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지금 여러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혹 여러분은 뒹굴고 돌아서고 별짓을 다할지 모릅니다마는, 여러분은 문제를 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 삶을 뒤돌아보려고 할 것입니다마는, 부득불 여러분은 다가오고 있는 생명이나 죽음을 향해 전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귀에 대고 "네가 어디 있느냐?(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속삭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최후의 안간힘을 다해 일대 격전을 치룰 것입니다. 그때는 강한 자도 허리를 굽힐 것입니다.
그때는 밝고 반짝이던 눈도 막으로 덮일 것입니다. 혀도 입천장에 달라붙을 것입니다. 손은 침상에 맥없이 얹혀 있을 것입니다. 발도 더 이상 몸을 지탱해 주지 못할 것입니다. 그때는 맥박도 힘을 잃을 것이며, 죽음처럼 차디찬 축축한 땀이 여러분 이마에 맺힐 것입니다. 이런 최후 순간에도 아직도 들려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폭풍을 함께 모아가지고 들려오는 무서운 소리입니다. 그것은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을 마침내 놀라운 태풍처럼 우렁차게 발하는 소리입니다. 기가 막힐 일입니다. 하나님 없이 요단강에 이르렀고, 소망 없이 무덤에 가까이 왔습니다. 이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도와줄 그리스도는 없습니다. 영원에 들어서면서도 영원한 구원의 소망이 없습니다. 이미 때는 끝난 것입니다.
마지막 고통이 통과하고 있습니다. 영을 몸에 묶어놓았던 실오라기가 끊어집니다. 여러분은 다른 세상으로 돌입한 것입니다. 그러나 "네가 어디 있느냐?"는 문제는 아직도 여러분을 뒤따르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영은 깨었습니다. 더 이상 잠을 자지 못합니다. 영은 이젠 음산하고 둔탁하며, 둔하고 죽음처럼 지키고 있던 지겨운 육체를 벗습니다. 영은 이제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의 소리를 참으로 듣습니다. 그 질문의 소리는 영 깊숙이 전율을 느끼게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영혼이 하나님 존전에 와 있기 때문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네가 어디 있느냐?"는 이런 외침은 잠깬 양심이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은 이에 답변하십니다.
"떠나가라, 저주받은 자여!"라고 말입니다.
영(spirit)은 에덴동산의 나무 사이에 이젠 숨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떠나 저 괴롬의 물결 속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혼(soul)은 살아서 고통을 당해오고 있습니다마는, 몸(body)은 무덤 가운데 잠자고 있어서 벌레가 탐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심판의 날, 뇌성이 울리는 날이 이르렀습니다. 모든 뇌성 위에 째지는 듯한 나팔 소리가 들려옵니다. 나팔소리에 따라 "일어나라 너 죽은 자여, 심판석으로 나오라"고 외칩니다. 그 무서운 소란의 와중에서도 "네가 어디에 있느냐?"는 외침의 소리가 들립니다. 천사 사신이 여러분의 몸을 찾아냅니다.
여러분의 몸은 푸른 잔디밭 밑 무덤에서 일어나서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솟아나옵니다. 그리고 무섭게도 창백한 영(Spirit)이 되돌아옵니다. 그리고 오랜 동안 고통을 당하던 몸의 혼이 부활한 몸속으로 돌아옵니다. 몸과 혼은 범죄시에도 동료였던 만큼 이제 심판 시에도 같은 동료가 됩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는 외침의 소리는 한 번 더 울립니다. 그 외침을 지금 내 말을 듣고 있던 바로 그 귀가 들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큰 흰 보좌가 나옵니다. 지금 나를 보던 그 눈들이 그 것을 볼 것입니다. 그 다음에 무서운 심판의 선고가 내립니다. 지금은 도무지 움직일 줄 모르던 마음이 그때는 소스라쳐 놀랍니다. 그 후에는 여러분 자신의 시련이 옵니다.
죄인이여, 죄인이여, 여러분의 공포를 나로서는 다 묘사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저 죽음의 소리, 그리고 여러분의 불멸의 영적 죽음에 대해서는 조금도 어떻다고 묘사할 수가 없습니다.(그것은 우리가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네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도다.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마25:42~46)는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오,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나는 여러분 개개인이 스스로 이 말을 착념하시기 기도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꿈에 대해 말해 온 것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것이 실제임을 아십시다. 만일 지금 그것을 실제인 것으로 모르신다면 오래지 않아서 알게 될 것입니다.
나는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피에 의지해서 여러분에게 간구합니다. 내가 이보다 더 강한 주장을 어떻게 쓸 수 있겠습니까?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알도록 해주시기를 비는 바입니다. 사랑에 젖어 여러분을 위해 우시는 하나님의 연민의 소리를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는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하시는 소리를 듣기를 겁낼 필요가 없이, 다만 "하나님이시여, 제가 여기 있나이다. 당신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도 여기 있나이다. 우리는 어린 양의 피에 예복을 씻어 깨끗케 하였나이다. 아버지시여,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영원히 영원히 하나님의 존전에 살기를 소망하며 이렇게 여기 있나이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오, 나는 한 사람이 자기의 생명을 위해 탄원하듯 여러분과 더불어 탄원하는 바 입니다. 이제 이 더러운 입술들이 불의 입술이 되기 바라며, 이 혀가 더 이상 육의 혀가 되지 말고 제단에서 젓가락으로 집어낸 불타는 재가 되기 바랍니다. 우리가 쓰는 말도 정결하게 되기를 빕니다.
오, 죄인이여, 왜 여러분은 죽어야 합니까?
왜 여러분은 멸망을 받아야 합니까?
여러분, 영벌은 무서운 사실입니다. 노하신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심이 사실입니다. 심판을 받아 유죄판결을 받는다는 것은 비참한 사실입니다. 그땐 입이 말하는 것이 모두 공포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뒤를 돌아보지 말고 피난하십시오. 평지에 머물지 말고 갈보리 산으로 피하십시오. 불타버리지 않으려면 어서 그렇게 하십시오.
"주 예수를 믿으라"고 외칩니다. 여러분의 혼을 다해 하나님께 의탁하십시오. 지금 곧 의탁하십시오.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행16:31)
설교자
스펄전
‘설교의 황태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찰스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1834.6.19-1892.1.31)은 영국 역사상 가장 화려한 시기인 빅토리아시대에 활동한 설교자였다.
2020년 11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