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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본문
본문의 축복은 아브라함이 자기 고향과 자기 아버지의 집을 떠나온데 대한 이중적인 결과올시다. 원래 동양인들은 자기 고향집에 완강하게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고향 떠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하기는 우리들도 고향 떠나는 것이 그리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기는 우리도 대서양을 건너가는 일을 상상해 보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지구의 다른 지역에 가는 것을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동양 사람들은 유브라데강이나 티그리스강을 건너는 것까지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강을 넘은 지역은 "물 건너"지방이라 말했습니다. 200내지 300마일이나 되는 여행이 그들에게는 죽은 다음으로 가는 큰 사건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고 하셨을 때, 그는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떠나갔습니다. 이와 같은 그의 순종은 영웅적인 믿음의 행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들이여, 이와 같은 순종의 결과로 인해서, 아브라함은 지금 본문이 말하고 있는 이중적인 축복을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믿는 자의 조상으로 호칭되기도 했습니다. 즉, 그는 하나님을 그렇게 믿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을 믿을진대, 우리도 한 사람의 신자로서 아브라함이 행했던 일을 행하게 될 것입니다. 자녀들은 자기들의 아버지를 닮습니다. 믿는 자들도 믿는 자들의 조상을 닮아가는 법처럼, 모든 신자들에게도 역시 그런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우리의 가정과 고향을 떠나오는 일이 있었던 것처럼, 모든 신자들에게도 역시 그런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우리의 가정과 고향을 떠나라는 소명을 받지는 아니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즉 우리는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분리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여러 사람들 가운데 살지만 그들에게 속해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불경건한 사람들 속에 섞여 살면서도, 여러분 자신을 경건하게 처신하도록 하기보다는 차라리 중이나 수녀가 되는 것이 더 쉬우며, 두문불출하는 것이 오히려 쉬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이 세상의 보통 사람들과 거래를 하면서도, 그들의 부정한 사업술에 빠지지 아니하는 일이라든지, 이 세상의 속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섞여 살면서도 그들의 사고방식대로 생각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생각을 열심히 상고하며, 지극히 높으신 이의 뜻을 순종하기에 전념한다는 것은, 이상에서 말씀드린 중이 되거나, 수녀가 되거나, 문 밖 출입을 금하고 들어앉아 있는 일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완전하신 사람이셨습니다. 그렇다해서 우리 주님은 옷을 특별하게 입으시거나, 기타 어떤 특정한 일을 가지고 기타 모든 인류와 자기 자신을 구별하시지는 아니 하셨습니다. 즉 외형적인 것으로 특별하게 구별 분리하시지는 아니하셨습니다. 주님은 다른 사람이 하는 대로 잡수시고 마시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앉는 식탁에 앉으시고, 그들이 기거하는 집에서 주무시고, 그들과 더불어 행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은 언제나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십니다."
모든 믿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분리된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불리움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란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후6:17)는 것입니다.
우리는 테가 넓은 모자를 쓰거나, 색깔 없는 코트를 입거나, 기타 다른 사람들과 특징을 이루는 따위의 겉치장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들은 단순한 외모로 분리되기보다는 실제상으로 분리구별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면에서 분리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보다 진실된 삶에서 분리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과 하나님 안에 있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신앙으로 분리되고, 기타 모든 사람은 생각지도 못할 열심으로 분리되어야 합니다. 아마 세상 사람들은 진실로 멸시할지도 모를 그런 열심으로 인해 분리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분리된 삶이야말로 그리스도 안에서 불리움을 받은 모든 신자들이 행해야 할 높고도 어려우며, 거룩한 하늘의 일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성취하는 정도에 따라, 오늘 본문의 말씀이 우리에게 사실이 될 것입니다.
"네게 복을 주어...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분리된 삶을 살지 아니했을 때는, 그만큼 그는 축복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갔던 사실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가 거기서 당한 고충과 그로 인해 더욱 더 많은 문제가 야기되었던 사실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오늘 아침, 내가 말씀한대로 바로 하갈은 바로에 의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노예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하갈이 가정에 초래한 고충이 어떠했던가를 여러분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분리된 삶을 살아서, 당시의 자기 주위 사람들의 풍습에 빠지지 아니했더라면, 하갈로 인한 범죄와 슬픔을 당하지 아니했었을 것입니다. 또 그가 자기 아내에 관해 거짓 행동을 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랄의 왕 아비멜렉으로부터 의로운 책망을 받지 아니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하나님 앞에 홀로 살아가고 있는 아브라함을 볼 때마다, 여러분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축복받은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때에 여호와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 만을 불러 그를 축복했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밖으로 뛰어나가 다른 사람들과 함부로 합류할 때에, 그는 풍만한 축복을 상실하고 괴로운 문제에 봉착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남녀 여러분께서도 여러분의 주님께 가까이 있을 동안에는 마냥 주님의 축복을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여러분이 근심과 시련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다 축복된 근심이요, 시련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세상으로 나가서 세상 사람들처럼 행동한다면,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야생 도토리 씨앗을 뿌리면, 반드시 그것을 거두어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오.
만일 하나님의 자녀가 거리의 망나니들과 함께 어울려 놀기 시작한다면, 그때는 하나님 아버지의 채찍을 강하게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아버지의 기타 많은 자녀들과 어울려 교제하고 살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짝이 될 동료에 주의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의 생활이나 일상생활 언어에까지 주의하지 아니하며, 아버지께서 시키시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지 아니하는 경우엔, 자기 어깨 위에 무겁게 내려치는 채찍을 당하고야 말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옛 이스라엘의 자녀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암3:2)
내가 이제 말씀드리고자 하는 축복은 분리된 삶을 살며, 좁은 길을 행하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그런 분리된 삶에 들어가서, 거기서 우리가 떠나지 않고 있는 정도만큼 우리는 복 받을 것이며, 또 축복이 될 것입니다.
Ⅰ. 첫째로 우리는 본문에 있는 대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첫째 축복을 보기로 합시다.
"내가 네게 복을 주리라"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축복이 먼저 온 사실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일차적으로 여러분을 축복해 주시지 아니하시면,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축복의 근원이 될 수가 없는 법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아무 것에 있어서나 이기주의를 좋다고 두둔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말하는 것은 여러분은 먼저 자기의 물주전자부터 가득 채우고, 그 후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여러분의 주전자에서 물을 먹게 하라는 것입니다. 또 다시 말씀드리면 여러분은 많은 사람들에게 떡을 떼어 주기에 앞서, 먼저 여러분 손 안에 떡을 많이 가지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텅 빈 바구니를 가지고 밭에 나가 씨앗을 뿌린다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괜히 바람만 뿌리는 일입니다. 그런고로 무엇보다 먼저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부터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학2:9)는 말이 있기 전까지는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는 말을 내어 놓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축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살았던 것처럼 살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주는 축복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아브라함이 믿었던 것처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는 축복이었습니다.
첫째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안식을 가졌습니다.
아브라함이 가진 집이라고는 장막뿐이었습니다. 장막이야말로 거주하기에는 불편한 모양의 집입니다. 또 아브라함은 자기 소유라고 불리울 만한 땅을 물려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는 단지 한 사람의 방랑집시와도 같습니다. 집시(gipsy)는 이곳저곳을 두루 배회하는 사람이지요.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다"(히11:9)고 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이 아브라함보다 더 평안하게 산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디서 아브라함을 만나든 그는 여러분 앞에 하나의 조용하고 고요하며, 고상한 인품의 상징으로 나타납니다. 야곱을 봅시다. 그는 언제나 간교하고 계약을 체결하며, 음모를 꾸미고 계획을 짜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런 성품은 전연 없었습니다. 그는 솔직하고 단순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온전한 신뢰에서 나오는 여유를 가지고 사업에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네 고향을 떠나라"(히7:3)고 말씀하시면, 그는 즉시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가서 "아브라함이여, 그대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도 어디를 가는지 모른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라고 하시니 그는 가고 있을 뿐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아직 약속의 땅에 거주하고 있는 만큼, 아브라함이 그곳에 간다는 것이 두렵지 아니할까요?
아브라함이 원주민에게 접근할 때 그들은 즉각 이를 해치지 아니할까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두려워하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에 가라고 말씀하시니, 그는 자기가 거기에 거할 당당한 권리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사람들에게 놀라운 공포를 내리시니, 그들의 마음속에는 "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손대지 말라"라는 소리가 속삭여 오는 듯했나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들 가운데 안전하게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조카 롯은 좀 더 평안하게 살 도성을 향해 소돔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먼데서 침략의 대군이 와서 그의 불쌍한 롯이 쫓기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행동에 대해서는 숙고하지도 아니하고 우선 롯을 구출하는 것이 자기의 일로 여겨, 자기 주위의 젊은이들을 대동하고 다섯 왕들을 추격하여, 마치 바람 앞에 뒹구는 그루터기처럼 그들을 몰아냈으며, 마침내 롯과 모든 노략품을 되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는 아무 것에도 손을 대지 아니했으나 성공했습니다. 그는 결코 아무것에나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유일한 법칙입니다. 그는 언제나 이것에 순종하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는 어디에 있든 온전히 만족했습니다. 왕들도 그 앞에 쓰러졌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왕적인 인품이 왕관을 쓰고 자주 옷을 두룬 왕들보다 더 참되게 위풍당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타고난 천생 왕자의 하나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은 단 한 번의 믿음의 접촉으로 아브라함을 왕으로 만드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행한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그는 참으로 위인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이 믿음은 아브라함에게만 가능하다고 말하지는 마십시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도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도 약속을 믿게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약속을 못 믿고 우왕좌왕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자, 여러분, 만일 우리가 인생살이의 길흉간의 모든 일을 겪어도 하나님을 신뢰하기만 한다면, 만일 우리가 우리의 눈이나 귀를 믿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을 믿기만 한다면, 비록 우리 자신의 몸이 마치 죽은 것같이 되었을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문자대로 지켜주실 것을 강하게 믿기만 한다면, 만일 우리가 믿음을 통해서 언제나 옳은 일만 행하고, 결단코 좌절하거나 탈선하지만 않는다면, 그때는 우리의 평안은 마치 강물처럼 되며, 우리의 의는 바다의 물결처럼 되며, 비록 불신세대의 조롱과 비방을 노골적으로 받으며, 유치하기 그지없고, 아름다울 만한 것이 없이 보일지 모르나, 우리의 인격에는 왕적인 위엄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야 무슨 말을 하든, 그들은 하나님을 믿으며, 또 믿음의 사람이 마땅히 살아가야 할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참으로 존경하며 우러러 보는 것은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마음의 평안이라 불리우는 풀잎을 단춧구멍에 진정 차고 있으려면, 다시 말해서 여러분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근심과 공포를 떠나, 만족하고, 조용하고, 행복하고 자유롭게 지내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이 하셔야 합니다.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시37:3)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학2:19)고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아니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 자신의 믿음에 따라 여러분을 축복해주십니다. 온 세상이 다 반기를 들고 일어서며, 근심하며 염려할지라도, 여러분은 평화롭고 행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여유 있는 믿음으로 인해 믿음의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라"(요일5:4)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싸움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싸우라는 소명을 받았을 때에는 참으로 열과 성을 다해 싸워, 그의 모든 대적자들이 아브라함에게 거꾸러지거나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과 기타 여러 왕들을 정복했을 때의, 그의 신앙의 승리는 단지 전투장에서의 승리일 뿐만 아니라, 차후의 승리이기도 했습니다. 왕들이 평지 도성의 왕들의 노략품을 취하고 그 모든 전리품을 가지고 갔으나, 아브라함은 그 모든 것을 회복해서 자기 것으로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소돔왕은 아브라함에게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창14:21)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재산입니다. 보통 사람은 그런 보화를 보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대답하기를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창14:22~23)고 했습니다.
족장은 말했습니다.
"내가 받은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지 소돔 왕으로부터 받은 것은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진정한 믿음의 승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이겨낸다는 것도 위대한 일입니다마는, 그리스도인이 의심스러운 일에 굴종하지 아니하는 것이나, 또는 비록 정당하다 하더라도 이기주의적인 일에 넘어가지 아니하고 버틴다는 것은, 보다 더 위대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한 경우야말로 참으로 믿음을 위한 승리입니다.
"아니야, 아니란 말이야, 나는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고, 무엇이나 할 수 있지만,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그것을 하지 아니 하련다. 나는 하나님을 신뢰한다. 내 미래의 생애의 어느 시점에 가서 혹자가 '저것은 그리스도인이 해서는 안 될 행동인데 저가 저렇게 하고 있구나'라는 말소리를 나는 듣지 않기 위해 지금 그 일을 하지 아니하련다. 그렇고 말고다. 나는 나의 하나님이 슬퍼하시거나 이름에 오점을 남길까 두려워서, 소돔 왕에게 속한 것은 실오라기 하나이든 신들메이든 일체 갖지 않겠노라."
아브라함이 그날 골짜기에서 거둔 승리는 얼마나 굉장한 승리였었습니까! 그리스도인도 믿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살면 그와 같은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이 가진 것만큼 많은 재산을 비록 가지지 못했다해도, 그것을 안달해서 열망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것이 없어도 나는 넉넉 행복하노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부를 주시기를 원하시면, 그는 그런 부를 누리고 살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부를 가슴에 안겨다 달라고 애태우지는 않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니야, 나는 이런 것들로 치부하지는 않겠노라. 나의 보화는 더 높고 고상한 것이니라"고 말입니다.
세상에는 부자가 되어서는 안 될 사람도 상당히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좀 부를 얻게 되면 그만 교만해져서, 금 우상을 만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천국의 상속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습니다. 그런 사람은 바울처럼 빈부귀천에 처하는 방법을 압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의 상태가 어떻든 만족할 줄을 배웁니다. 그런 교훈을 배운 사람들이야말로 복 받은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미 받았고 또 모든 신자가 다 받을 수 있는 또 다른 하나의 축복은 이것이니, 곧 그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오, 우리 모두가 그런 능력을 소유하고 또 그 능력을 언제나 활용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평지의 도성들을 멸하려 했습니다. 그것은 도성들이 가공할 만큼 죄악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18:17)
과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상과 같은 질문을 문의해 볼 상대가 될 정도의 축복받은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그리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서 그에게 이제 막 하시려고 하는 일을 말해 준 것입니다. 즉시 아브라함은 자기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께 탄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과 하나님, 이렇게 두 인격 사이에 벌어진 너무도 유명한 대화였습니다. 여러분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탄원했던가를 잘 알고 계십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 성 중에 의인 50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50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창18:23~24)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의 탄원은 "5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5인 부족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창18:28)라고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의인의 수를 40, 30, 20, 마침내는 10인으로 내렸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 사람, 이 족장, 이 광야의 유목인이 영원하신 하나님과 겨루고 탄원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왕위에 앉은 여러 왕들의 장엄함에 대해서는 내게 말하지도 마십시오. 하나님과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아브라함은 그 모든 왕들을 함께 모아놓은 것보다도 더 위대한 것입니다. 군중들의 환호성 속에서 전쟁에 갔다가 돌아오는 용감한 용장들에 대해서도 내게 말하지 마십시오. 다만 여호와의 팔만을 붙잡고 있는 이 외로운 사람, 다시 말해서 이 멸망 받을 도성의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자비를 긴급히 간구한 이 아브라함이야말로, 기타 어느 사람들보다도 더 위대한 사람인 것입니다.
루터가 거리를 따라 걷고 있노라면, 그 당대 사람들은 "저기 자기가 구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께 구해서 얻어낼 수 있는 사람이 걸어가고 있노라"고 루터에 대해 곧잘 이야기하곤 했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동일한 특권을 주신 바 있는 몇몇 사람이 있음을 나도 알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오직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온전히 하나님께 의탁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서명날인만 해놓은 백지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서명 날인한 백지 위에 우리가 기록한 대로 하나님은 다 보증해 주시니 이 얼마나 굉장한 특권입니까? 하나님은 그 백지위탁을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의 놀라운 말씀 가운데 우리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그 말씀은 무엇인가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시37:4)라고도 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낙원의 은 열쇠들이 성도의 허리에 매달려 있는 것과 같아서, 넣고 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비 오게 하는 열쇠는 가지지 아니했었습니까?
엘리야는 열쇠를 잠그어서 3년 6개월동안 구름을 닫았고, 다시 열쇠를 빼니 지면에 축복의 비를 내리지 아니했던가요?
오, 우리도 이런 믿음을 가진다면, 은혜의 보좌에 내리는 이 높은 특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때에 우리는 우리의 필요에 따라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며,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 각자에게 온전히 성취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게 네게 복을 주리라"고 하신 것을 이행하십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좀 더 한 가지 사실을 추가시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시련 아래서 견디어 낸다는 것이 위대한 축복이란 사실을 취하게 된 일입니다.
여러분은 아브라함에 관한 어떤 기록을 유의해 오신 것이 있습니까?
아브라함의 기사가 특이한 것은 그의 아들 이삭을 바친 이후였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에게 내릴 수 있었던 가장 뼈아픈 시련이었습니다. 그것은 나아가서 자기의 친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것도 독자, 그의 사랑하는 아들, 기적적으로 얻은 이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강건한 신앙을 가지고 확신한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이행하실 것이며, 하나님은 필요하시다면 죽은 자 가운데서 이삭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아브라함은 탄탄히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주어진 명령을 두고 생각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엄한 뜻으로 보이는 것을 행했을 따름이었습니다. 이 커다란 시련이 있은 후 얼마 있지 않아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창24:1)
시련을 겪은 순간은 그의 긴 생애 가운데 잠시 동안이었으나, 하나님은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시고, 또 실제로 복을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창24:1)
어째서 이렇게 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했을 때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범사에 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내 사래를 제거하셨을 때 이런 일이 생긴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다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축복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마도 그의 생애에 이런 시련도 없었더라면, 이상의 축복들은 실현되지 아니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이 문제를 잠시 유의해 봅시다. 여러분과 나는 우리의 모든 염려, 시련, 가난, 수고를 가지고 우리의 여정을 마칠 때에, 만약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을 가진다면, 우리 각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축복해 주셨도다. 시련 가운데서도 그를 축복해 주셨고, 비록 잔인하게 보이는 믿음의 심한 시험 가운데서도 그를 축복해 주셨고, 그 모든 시련 아래서도 그를 지키사 축복해 주셨도다."
만일 내가 나이 많은 항해사라고 한다면, 유리 같은 고요한 바다 위에서만 생을 보낸 것이 고작 전부가 되는 것을 좋다고는 생각지 않겠습니다. 가령 내가 나이 70이 되어 집에 있을 경우, 나의 어린 손자 녀석들이 내 주위에 둘러 앉아 나의 항해사의 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를 때에, 겨우 하는 말이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되고 만다면 나는 싫습니다.
"얘들아, 나는 폭풍우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내 평생에 나는 단 한 번도 폭풍우를 만나보지 아니했거든. 나는 순풍이 아니면 바다에 나가지를 아니 했거든. 내가 승선할 때마다 모든 폭풍우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어떤 항구에 이르기까지 할 일이란 아무 것도 없이 그냥 배를 타고 멀리 바라보기만 하면 되었더란다."
나는 항해사의 생활에 그토록 들려줄 재미있는 이야기가 없다는 것은 유감으로 봅니다. 이야기를 듣던 손자 녀석들이 "그럼 할아버지, 큰 파도도 없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음, 없었고말고"라고 대답이 나오게 됩니다.
"암초에 걸리지도 아니 했고요?"라고 물어보면, "그래, 나에게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저 조용하기만 했단다"라고 대답이 나옵니다. 그런 항해사의 생활에 대해서는 들려줄 말은 없습니다. 그런 항해사에 대해서는 별로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가령 우리 중에 어느 사람이 군대에서 제대한 후에도 "나는 화약 냄새도 맡아보지 못했다"고 말한다고 봅시다. 우리 군인들이 전투에 나가 싸우지 않기만을 위해 내가 기도한다면, 그때 그런 사람은 별로 군인다운 데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시련과 고충을 떠나서는 강건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첫날부터 끝날까지 우리 앞에 있는 떡과 기름에 부족이 없고, 먹을 식량에 부족이 없으며, 애써 노동한 바가 없고, 심한 고통을 받아 보지도 아니하고, 쓰라린 아픔을 당해보지도 않고, 깊은 어려움을 맛보지 못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발견해 보지 못했을 경우, 하나님에게 돌아가야 할 영광에 대해서는 별로 바칠 것이 없노라고, 우리가 천국에 이르게 될 때에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큰 물결을 당해서도 일하고, 폭풍우의 맹렬한 사나운 빗발 가운데도 지나며, 죽음의 계곡을 지나면서 안전하게 항해한 사람이야 말로 복 받은 사람입니다. 공포의 이유가 많지만 공포를 가지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초자연적 능력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런 공포에서 구해주시니, 그들이야말로 얼마나 복 받은 사람인지 모릅니다.
그런즉 형제들이여,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찾아오는 축복을 흔히 맞이하게 될 것인데, 그 축복이 오는 형태를 보면 천국으로 나아가는 순탄한 길에서가 아니라 끝까지 참는 믿음의 형태로 옵니다. 그렇게 하는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갖가지 시험에서 승리하고, 마침내 여러분의 안식으로 들어가며, 결국은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일에 축복하시니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복될찌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진 또 다른 은총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시는 최대의 축복은 하나님이 친히 같이해주시는 하나님의 임재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 생의 모든 축복 가운데 어느 것을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부따위는 분명코 구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이 평안을 줄 수는 없기 때문이죠. 나는 인기를 구하지도 아니하겠습니다. 항상 다른 사람들의 입에 자기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그리 편한 일이 아닙니다. 그만큼 처신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최대의 영예로 알고 하나님께서 항상 나와 함께 해 주시기를 택하겠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두 경우에 다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느부갓네살의 맹렬히 타는 불가마와 안락한 생활 사이에 누가 무엇을 굳이 선택하겠습니까?
그런 경우에는 아무 것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어도 그저 행복하기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면, 우리가 어디로 가든 우리 자신의 분위기를 그대로 유지하며, 또 어디로 여행하든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계셔 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세처럼 "여호와여, 당신은 모든 세대를 통해 우리의 거처가 되니이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런 마음은 하나님으로 충만한 천국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 안에 거하고, 또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온갖 축복으로 복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으며, 세상에서 뛰어나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삶을 사는 모든 사람의 특권입니다.
믿는 자여, 머리를 숙이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진정코 내가 축복으로 네게 복을 주노라"는 말씀을 하실 수 있도록 맡기시기 바랍니다. 비록 슬픔도 당하고 고통도 겪으며, 피곤하고 무거운 짐을 지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내가 네게 복을 주리라"는 말씀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가난하며 멸시를 받으며 욕설을 받기도 했지만, 이 축복은 조금도 삭감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즉 이 축복을 여러분은 받아들이고 즐거운 여정을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Ⅱ. 이제 우리는 본문의 제2부를 보기로 합시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제2의 축복을 생각해 봅시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사람을 축복해 주실 때에, 바로 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의 축복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자기 주위의 여러 사람들을 위해서 축복을 흘러넘치게 되도록 아브라함을 충만하게 복을 주셨습니다. 성령님은 사람 속에다가 하나님의 생명을 넣으시사, 그 생명이 그로부터 나와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흘러가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복을 줄 수 있을까요?
나는 이에 답합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의 본을 보임으로서 다른 사람을 축복합니다.
여기 계시는 분 중에서 저 유명한 복음 설교자, 죤 앙겔 제임스씨의 말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한 사람도 없으리라 봅니다. 나는 33년 전 캠부리지에서 버밍함에까지 여행하던 일이 기억납니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죤 앙겔 제임스씨의 설교를 들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가 설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나는 큰 위안과 기쁨을 받았습니다. 그가 열성적인 탐구자란 책을 쓴 것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그 책은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수단이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죤 앙겔 제임스씨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어 설교자가 되었는지 들어 보셨습니까?
죤 앙겔 제임스씨도 여러분 중 많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어느 사무실의 서기로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주인의 구내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가 퇴근 후 밤에 기도나 성경 읽기란 아예 생각도 못하고 바로 곧 잠자리로 들어가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같은 사무실에 어린 청년 서기가 한 사람 왔습니다. 제임스는 2층에 올라가 재빨리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놀랍게도 새로 온 서기는 촛불을 옮겨놓고 자기 상자로 가더니, 성경책을 꺼내 와서 책상을 당겨놓고 마치 자기 집에서처럼 극히 조용한 자세로 앉아서 한 장을 읽더랍니다. 그 후 또 역시 그렇게 신중하게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더랍니다. 그런데 그는 죤 앙겔 제임스씨에게 기도하지 않는데 대해서 한마디도 말하지 아니했습니다. 사실 말하기보다는 더 큰 일을 해냈습니다. 그는 묵묵히 자기가 몸소 기도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수개월 이내에 제임스씨는 변화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 2,3년 이내에 그는 복음의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나는 제임스씨가 그토록 훌륭한 사역자가 된 것은, 저 무명존재의 한 서기가 자신 있게 옳은 모범을 보여준 것을 작심하고 따른 데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젊은 서기에게 "내가 네게 복을 주어...너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할찌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젊은 서기는 나중에 자기 자신에게 "하나님 그날 밤 거기서 내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게 된 것을 감사하나이다. 나의 그 조그마한 행동 하나로 말미암아 그 하나님의 사람이 예수님의 발밑에 오게 되었고, 그것으로 인해 수만 명의 사람의 믿게 되었으니 말입니다"라고 말했는지는 나도 모르겠습니다.
"네가 복의 근원이 될찌라."
오, 우리의 모범도 그렇게 되기를 빕니다. 가령, 우리가 어디를 가든, 우리는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혹자는 아주 가난한 이웃에 속해 살아온 사람도 있습니다. 가난해져서 뒷골목의 빈민굴에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개심하자 그곳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겠지요. 나는 그렇다고 해서 조금도 여러분을 책망하지는 않으렵니다. 누군들 그런 곳에 머물러 있으려 하겠습니까? 그러나 동시에 딱한 일도 있습니다. 램프가 켜지는 순간 우리가 그 램프를 어두운 구석에 두지 않고 빼내어 오려고 한다면 그것은 유감된 일입니다. 그런 빈민굴은 여러분의 모범을 필요로 하는 곳입니다.
내 형제여, 여러분은 소금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만일 소금이 없으면 부패하고 말 어떤 곳에 있지 않습니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꼭 여기에 살면서 귀신을 쫓아 버려야 해, 우리는 이 모퉁이를 떠나려하지 않겠노라. 우리는 여기 있겠노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기까지 원수와 대항하리라"고 말입니다.
더 나아가서, 내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들은 그들의 기도를 축복의 근원으로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의 기도의 응답으로 인해 우리에게 내린 한량없는 축복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여러분 가운데 있겠지요?
자기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이 없는 그런 자야말로 불행한 자올시다. 그러나 매일 여러 성도들의 기도의 대상이 된 자야말로 실로 부자올시다.
오,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하나님이 여러분을 구원해 주셨을진대,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에 결단코 인색하지 마십시오. 나는 기도에 가담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나는 기도의 사람을 많이 갖고 있음으로 해서 나 자신을 부자로 여깁니다. 수천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아침저녁 기도할 때마다 나를 잊지 않고 기도해 주며, 탄원하는 사실을 알고서 내가 기뻐하고 위로를 받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나는 그들에게 뜨겁게 감사합니다. 그들이 나를 위해 기도한 것이 가장 친절한 일을 해 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자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기도하시고, 죄가 목에까지 가득한 우리의 사악한 도성을 위해 밤낮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에 힘을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여, 그대는 골방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지극히 높으신 주에게 힘차게 부르짖으십시오. 이 악한 날들이 그것을 필요로 하고 있답니다. 우리가 중재의 기도를 원한다면 바로 지금입니다.
요한 녹스의 기도는 스코틀랜드를 구했습니다. 실지로 그러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영국을 구원하고 이 시점에 우리 조국을 축복해 줄 그와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강렬하고도 열정적인 기도로 말미암아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 되신 여러분은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해 주셨을진대,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일상생활로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합니다.
재치 있는 목사 시드니 스미스씨가 좋은 말씀을 곧잘 해 주셨는데, 그 중에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을 한 가지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매일 누구를 대상으로 하든 그를 행복하게 해 드리는 것을 규칙으로 삼으라. 기쁘게 하는 방법이야 어린이에게 동전 한 푼을 주는 것이든, 아낙네의 무거운 짐을 옮겨다 주는 것이든 상관할 것이 없다."
참으로 이 세상에는 비참한 일도 너무너무 많은데, 게다가 우리가 어린아이를 울린다든지, 아니면 지나가는 개 한마리라도 짖고 가도록 만든다면 실로 유감된 일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모든 사람을 기쁘게 만들어야함이 마땅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여러 종류의 여러 입장에 처한 사람들에게, 항상 좋은 일을 행하시며 다니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가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최대의 즐거운 눈초리와 가장 명랑한 얼굴빛을 지니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는 어떤 신앙고백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너무도 겁날 정도로 선하고, 너무도 괴로울 정도로 경건해서 도무지 그런 사람들 곁에 나는 살 수도 없습니다.
"그대가 저것은 해서는 안 된다. 그대가 또 이것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금지 조항이 그들의 이마에 써 붙여 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행해서는 안 될 것을 모두 그들은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우리들이 지닌 신앙의 거룩성 속에는 무언가 기쁘고 즐겁고 명랑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은혜로우신 구주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우리 구주님은 은혜로웁고 즐거우신 분입니다. 물론 우리 주님은 슬픔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마는 기쁨의 구주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모든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우리 가운데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합시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전력을 다해서 모든 사람에게 복의 근원이 되어주고, 우리 모두는 아무도 돌보지 않고 버림받은 저들에게 축복이 되어 줍시다. 저 길로 나아가서 잊어버린 채 버려두고 있는 사람들을 기억합시다.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도웁시다. 깊은 가난에 빠진 저들을 구조합시다. 여러분은 이 세상이 어떤 가를 알고 계십니다. 있는 사람에게는 무엇을 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차라리 가난한 사람, 필요를 절감하고 있는 사람,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고개를 돌리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여기야 말로 우리가 그저 값없이 선물을 던져주어야 할 곳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은공을 끼쳐 드려도 우리에게 다시 되돌려 갚지도 아니할 테니, 결국은 우리가 그들에게 선행을 행하면 마침내 마지막 날에 가서 우리는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 그러한 신앙이야말로 참으로 축복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디에 가든지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기에 전력하겠기 때문입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고 했습니다.
이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왔을 때에는 분명히 그것의 핵심요소는 아브라함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인해 온 세상에 축복의 근원이 되어진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오셨습니다.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2:16)
우리 구주님은 한 사람의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친히 그 민족 가운데서 태어났습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은 온 세상의 축복이 되었습니다. 지금 영적으로 말해서, 믿는 우리들은 다 아브라함의 자녀들입니다. 물론 우리들은 단순히 육신에 따라 아브라함의 자손된 사람들이 처한 것과 같은 언약에는 들지 아니했지만, 그러나 우리는 약속의 자녀인 이삭과 같이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육신을 따라 난 것이 아니라 다만 성령님의 능력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브라함 안에 있는 믿음, 또 성령님의 은사로 인해 우리 안에 거하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일 여러분과 내가 다른 사람에게 축복의 근원이 되고자 할진대, 그렇게 되는 방법은 우리가 나날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으로 됩니다. 여러분의 구세주에 대한 말씀은 빠뜨려놓고, 친구에게 쓸데없는 소리만 늘어놓지는 마십시오. 그 귀한 예수님의 이름은 소개하지 않고, 어느 집에 장시간 괜히 무료하게 앉아 있지는 마십시오. 그 귀한 예수님의 이름 속에는 향기도 많고 맛도 많으며, 위로도 많고 신유도 많으며 생명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아무리 자주 그 귀한 이름을 말해도 끝이 없으며, 여러 동무들에게 그 귀한 이름을 아무리 자주 소개해도 끝이 없을 것입니다.
나는 얼마 전에 수갑을 차고 경찰에게 끌려 교도소로 가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무서운 악한이라고 합니다. 그의 얼굴은 사람 얼굴같지를 않다고 합니다. 그는 천생 살인자처럼 흉악하게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파출소에 서 있을 때에 그를 보기조차 하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꼬마 소녀가 그의 곁으로 가서 그를 빤히 쳐다보고선 "불쌍한 아저씨, 나는 아저씨를 가련하게 여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런 말을 듣고 욕설이나 험담을 털어놓을 만큼 험악한 사람같이 보여서, 이 소녀는 그만 놀라서 자기 아버지에게로 달려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소녀는 오랫동안 아버지에게만 붙어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 악한 사람에 대해 그 소녀에겐 무언가 끌리는 것이 있어서, 다시 이 소녀는 그 사람에게로 가서 "불쌍한 아저씨,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을 가련하게 여기십니다. 그렇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경찰이 이 죄수를 교도소 간수장에게 넘기면서 하는 말이 "이 사람은 당신을 무척 괴롭힐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만난 자 중 가장 무서운 난폭한 짐승 같은 놈입니다. 이 놈을 잡노라고 많은 사람이 동원되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아침 그는 조용하기 그지없고 순종형의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형기동안에도 이보다 더 훌륭한 모범수가 없을 정도로 착했습니다. 그가 교도소를 나올 때는 변화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목사에게 말하기를 자기가 그렇게 변화된 사람이 된 것은 꼬마 소녀가 찾아와서 말할 때였다고 했습니다. 꼬마 소녀는 자기를 가엾게 여기고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자기를 가엾게 여기신다고 말해주는 소리를 듣고 변화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 복된 예수님의 이름을 보다 자주 사람들에게 들려줄 때에, 오늘 읽은 성경 본문은 그대로 성취될 것입니다.
즉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는 말씀이 성취될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에게로 나가서 하나님 안에 쌓아 둔 축복을 발견하고, 그 다음엔 우리 가족과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축복의 근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 하나님이시여, 그렇게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귀하신 아드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설교자
스펄전
‘설교의 황태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찰스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1834.6.19-1892.1.31)은 영국 역사상 가장 화려한 시기인 빅토리아시대에 활동한 설교자였다.
2020년 11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