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본문
오늘 아침 우리는 세계 창조에 관한 모든 논의를, 이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두고 연구해 온 신학자들과, 또 세계 창조에 관해 상당히 많이 알고 있거나, 또는 알고 있노라고 생각하고 있는 지질학자들에게 일단 일임하기로 했습니다. 세계 창조는 매우 흥미 있는 주제입니다마는, 오늘 아침 이 문제는 고려하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과제는 과학적이라기보다는 도덕적이며 영적인 것입니다.
저는 성령님께서 고린도후서 4장6절에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특이한 본문을 인용해서 오늘의 설교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바울은 거기서 말하기를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4:6)고 했습니다.
옛 창조는 새 창조에 대한 하나의 교훈적 모형입니다. 하나님께서 옛 창조를 형성하시던 그 방법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 피조물인 하나님의 백성들을 준비하고, 마련하는 하나님의 방법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이제 우리는 신약에 의해 명백히 확증되고 있는 유사귀절에서부터 빛을 모두 다 모아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공상적이며 부자연스럽거나, 또는 단순히 호기심에 가득한 사실들을 고안해 내려는 과오는 범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는 바입니다. 오늘 설교의 목적은 교화와 위로를 주자는 것이지, 기발한 착상을 과시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빛으로 빛을 볼 수 있도록, 영원한 성령님의 빛이 지금 우리에게 비춰주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인간의 타락한 성품이 바로 곧 하나의 혼돈입니다.
이 혼돈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창1:2), 흑암이 깊음 위에 있어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성령님을 보내시사 인간에게 비로소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성령님은 신비롭게 사람의 영혼에 들어 오셔서 그 위에 머물고 계십니다. 마치 옛적에 수면에 운행하신 것과 같이 말입니다. 성령님은 죽은 영혼을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성령님의 임재와 관련해서 하나님의 첫 축복인 빛을 인간 영혼에 보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가지고 인간의 이해를 촉구하시며 비춰 주십니다. 이 하늘의 빛이 인간에게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임무를 계시하며, 또 인간이 그 임무를 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계시하기도 합니다. 또 이 하늘의 빛이 인간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인간의 죄악과 인간자신의 허물과 이에 따른 위험이며 또 인간 자신의 여하한 노력을 기울인다 해도, 이 위험에서 도저히 탈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겠습니다. 바로 동일한 그 빛이 인간에게 그리스도의 인격, 그리스도의 사역, 그 사역의 타당성, 그 사역의 자유함을 보여줍니다. 이 빛이 인간으로 하여금 단순한 믿음의 행위로 구속의 유익을 얻는 방법을 알도록 해 줍니다. 주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창1:3)고 말씀하실 때야말로 어느 누구에게나 복스러운 순간입니다.
여러분이 본장을 잘 들여다보면, 여러분은 그 빛이 말씀에 의해 최초로 세상에 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창1:3)고 했습니다. 빛이 사람에게 찾아 온 것은 이 책, 곧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빛이 인간의 마음속에 비취인바 된 것은 로고스, 곧 말씀으로 호칭되는 그리스도를 통해 된 것입니다.
그것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참 빛입니다. 세상에 임하셔서 모든 사람을 비쳐주던 빛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성령님은 새 창조에 관여하고 계십니다. 그는 사람위에 머물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아드님은 또한 창조주이십니다. 그는 말씀입니다. 그가 없었다면 아무것도 만들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 빛이 왔습니다.
아버지 역시 동일한 거룩한 사역에 연합하셨습니다. 말씀하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성취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영혼을 새로 창조하는 데에 3위 1체 하나님이 관여하십니다.
오, 3위 1체 하나님이시여, 이제 새로 창조함을 받은 우리 인간이 영과 혼과 몸의 3위 1체적 성품을 가지고 당신께 경배를 드리나이다.
태고의 어두움 위에 내렸던 그 빛은 매우 신비로운 빛이었습니다.
그땐 아직 궁창에 빛을 내는 태양이나 달이 없었던 만큼, 이 빛은 자연 법칙에 따라 내려온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처음에 영적 빛이 자연계에 어두운 밤을 비추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빛은 어떤 사람의 명백한 사역의 도움이 없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몇몇 사람에게 비추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편 또는 저런 방편으로 빛을 보내시기는 했습니다마는, 어느 경우나 그 빛은 하나님 자신의 역사인 것입니다. 방편 자체는 그야말로 너무도 무력함이 명백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행하신 역사의 모든 영광은 온전히 하나님 자신에게만 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어둠을 제거하시고, 또 어떻게 지성을 비추어 주셨냐는 방법 문제는,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알고 계시는 하나의 비밀입니다. 참으로 신비롭게도 빛이 사람의 영혼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이 빛에 대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그 빛이 왔던 간에 그것이 참된 빛일진대,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이 주신 빛이며, 모든 빛의 위대한 아버지로부터 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앞으로 영광스러운 빛이 내려오지 않을 것이며, 또는 내려올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 혼돈된 세계에는 처음부터 내재한 빛도 없으며, 태고의 그 어두움에서부터 개발해서 생겨나올 광채도 없는 만큼, 여호와께서 개입하셔서 위에서부터 빛이 있으라고 명령하는 일은 필연적인 과제였던 것입니다.
오, 인간의 마음이여, 그대 자체가 암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 안에서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빛은 순간적으로 왔습니다.
지구를 만드는 데에는 엿새가 걸렸습니다마는, 지구를 비추는 데에는 오직 한 순간만으로 족했습니다. 하나님은 중생의 역사도 아주 재빨리 하십니다. 하나님은 한번 불빛이 번쩍이는 순간처럼 인간의 영혼에 빛과 생명을 투입하십니다. 은혜의 역사는 점진적이나 은혜의 투입은 순간적입니다. 비록 그 투입이 순간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은혜가 천박하며, 단명적인 것은 아닙니다. 빛이 빨리 왔다고 해서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빛은 지구가 옛날에 즐거웠던 한 순간에 받아들인 영구한 은혜였습니다.
빛은 계속 머물고 있었습니다.
빛은 증가했습니다. 하기는 지구 위의 여러 곳에 필요에 따라 밤이 있었고, 날이 계속됨에 따라 아침은 물론 저녁도 있었습니다마는, 처음에 영원하신 말씀이 빛으로 깊음 위를 비춰 주신 그날 이래로 지금까지, 축복의 그 빛이 지구를 결단코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사람의 영혼에 은혜를 주실 때에도, 그것은 순간적으로 온 것입니다마는 결코 떠난 적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느니라"(롬11:29)고 했습니다. 어두움이 지배세력에 투쟁해 왔습니다마는, 일단 한번 주어진 빛을 어느 누구도 없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빛은 온전한 날을 향해 보다 많이 비춰야 할 것이며, 또 비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유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생각하려는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즉 오늘 택한 본문은 오직 창조의 첫날에 관한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 첫날의 역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시고, 그것을 인정하셨다는 것이 오늘의 본문 가운데 제시된 것입니다. 창조의 첫날은 우리들의 영적생명과 회개와 회심과, 그리고 주 예수를 처음으로 믿던 신앙을 분명하게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목적은 어린 신자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최근에 이 참 빛의 비침을 받은 자들을 격려하고자 함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믿어 온 분들에게는, 최근에 빛의 비침을 받아 믿게 된 초신자들에게 대한 의무가 무엇인지 몇 말씀 아울러 드리고자 합니다.
Ⅰ. 우리가 처음에 생각하려는 것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무엇이나 보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빛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빛의 관찰자이십니다.
그 빛나는 영광을 바라볼 눈이라고는 사람의 눈도, 새의 눈도, 짐승의 눈도 일체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만이 그 빛을 보셨습니다. 가령 여러분이 최근에 새롭게 하나님의 빛의 비췸을 받은 체험자가 되었다고 했을 경우, 여러분 마음의 변화를 보아 줄 그리스도인 동료가 없음으로 인해서 심히 괴로워할지 모르나, 그러나 슬퍼하지는 마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고 계시니 말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남모르는 곳에서 혼자 우신 적이 계십니까?
그런데 이제 구주님을 발견하시고 영혼의 허탈 상태에서 다만 그 구주님만 바라보고, 그 구주님 안에서 어떤 누구도 안겨다 줄 수 없는 하나의 기쁨을 발견하셨습니까?
여러분의 회개와 여러분의 믿음을 인간이 보아 주지 않는다는 일은 별로 대단치 않은 문제올시다. 여러분의 회개와 믿음을 생기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런 것들을 보아주시니 족합니다. 혹 여러분의 아버지나 어머니도 여러분에게 생긴 변화를 인식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로 위로를 삼으십시오. 즉 여러분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여러분을 보고 계시며, 하나님의 마음은 여러분에게 사랑을 보내고 있습니다.
탕자가 아직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었건만 아버지는 그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렇거늘 여러분의 하늘 아버지도 여러분을 보시게 마련입니다. 아버지가 탕자를 보신 사실이 그 탕자에게 그토록 만족한 일인 것처럼, 이제 하늘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보신다는 사실이 역시 여러분에겐 만족한 일입니다. 여러분의 회개의 눈물에 하나님은 그 눈을 두시고, 여러분의 신앙의 광채에 하나님은 시선을 두십니다.
"하나님이 빛을 보셨다"바로 이 아름다운 진리가 외로운 신앙을 가진 자들과, 많은 실망을 당한 자들과 동정을 별로 많이 얻지 못했거나, 또는 전연 받아보지 못한 그들에게는 그토록 아름다운 말일 수가 없습니다.
사막에 있던 하갈처럼 여러분은 이렇게 기쁘게 외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신다."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시34:15)라고 말입니다.
"나는 가련하고 부족하오니, 주께서 나를 생각하옵소서"라고 다윗은 말했습니다.
오, 초신자들이여, 하나님께서는 당신 안에 두신 은혜의 역사를 보고 계십니다. 그것이 비록 첫 날에 된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이 밝히며 오셨던 그 빛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습니다. 자, 이런 만큼 여러분은 두려워할 필요가 도무지 없습니다.
고대 사상의 웅변가인 플라톤은 청중이 있는 것으로 족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만이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관찰자의 전부가 되신다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러분은 시편 기자와 같이 다음처럼 기쁘게 기도하시면 되겠습니다.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에게 베푸시던 대로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말입니다.
그 빛은 소리도 없이 조용히 세상에 들어왔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셨습니다.
빛을 주던 하나님의 말씀의 출현은 "마음의 엄숙한 고요"속에서 효력을 발하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빛을 발한다고 한다면, 온 시가 떠나가라는 듯이 떠드는 꽃불 타는 소리라도 들을 수 있겠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 태양으로 땅을 비취실 때에는 소리 없이 날이 밝아옵니다.
옛 사람들이 태양의 이륜마차에 관해 말했습니다마는, 지금까지 바퀴소리나 하늘의 말의 발굽소리를 들은 자가 누구입니까?
아침의 밝은 광선이 넓게 퍼질 때에도 하늘에 요란한 소리는 도무지 들리지 아니했습니다.
"아침에 동쪽에서 장미 빛을 발하는 태양이 동양의 진주로 땅위를 내려 비췰 때에도" 우리는 아무런 발자국 소리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새들은 아름다운 노래로 떠오르는 햇님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건만, 햇님은 아무런 소리도 없이 가만히 떠오릅니다. 이와 같이 은혜가 사람 속에 들어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속삭이는 숨결소리도 들리지 않고 은혜는 들어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빛을 보시고 계십니다. 빛은 그 자체가 광고입니다. 빛은 빛을 광고한 나팔이 필요치 않습니다. 은혜에 있어서도 역시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젊은 친구여! 여러분 안에서는 은혜의 역사가 심히 조용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다른 사람의 경우에는 이런 일이 생겼을지도 모릅니다마는, 아마도 여러분은 특이할 만한 설교나, 무시무시한 꿈이나, 병석에서의 체험이나, 율법의 무서운 공포 같은 것이 전연 생각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주께서 그 마음을 여신 루시아로 여김을 받아왔습니다. 또는 디모데처럼 여러분은 어릴 적부터 성경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즉 여러분의 신실성에 혐오를 느끼지 마십시오. 또는 은혜의 역사의 진실성을 의심하지도 마십시오. 여러분의 영혼 안에 일어난 역사가 비록 아무리 조용하고, 또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숨겨져 있으며, 또 아무리 미미하고 평범한 것이라 할지라도, "주께서 그 빛을 보셨다"는 본문의 말씀으로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빛을 선포하는 나팔도 없었으나 하나님께서 그 빛을 보셨으며, 빛에 관해 아무런 언급도 없었으나 하나님께서 역시 그 빛을 묵묵히 보셨으니 이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은혜의 체험에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지구 자체는 빛을 인식할 수 없었으나, 하나님께서 빛을 보셨습니다.
형편없이 우둔해 있는 혼돈의 지구, 그것이 무엇을 알 수나 있겠습니까?
최초의 그 밤을 두고 어디 말해 봅시다. 빛이 어둠을 비쳤건만 어둠이 빛을 알지 못했습니다.
처음 믿는 초신자는 자기 자신에 관해 회의를 품을 때가 얼마나 자주 있었습니까?
"이것이 빛인가? 또는 빛이 아닌가?"라고 묻기를 얼마나 자주 했습니까?
이렇게 마음의 커다란 추구를 어찌 비단 초신자만이 가진 체험이라 하겠습니까?
우리들 가운데 좀 더 앞서 발전된 사람들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빛을 볼 수 없건만 하나님께서 빛을 보신다는 사실을 생각하고서 무척 기뻐했던 것입니다. 초신자 아닌 우리들에게도 회의와 공포, 예민한 죄의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고 계시는지를 의심하기까지 했던 때도 있습니다. 성장한 성도들에게도 이런 일이 있거늘, 생명의 첫 아침을 맞이한 은혜 안에 깃든 초신자 어린 아기에게 그런 의심이 생긴다고 해서 과히 놀랄 것은 없습니다. 혹 그 회의가 "과연 내가 빛 안에 있느냐 없느냐?"라는 심각한 문제로 변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들도 "이것이 빛인가 아니면 가시적인 어두움뿐인가?"라는 근심어린 질문을 내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어두움을 계시하고, 우리로 하여금 보다 더 많은 것을 갈구하기에 충분한 빛을 가지지 못했다고 해서, 슬퍼한 적이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오, 괴롬을 당하고 있는 자여, 지구 그 자체가 빛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빛을 보고 계셨다는 이 사실을 여러분의 마음속에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빛을 떠나서는 아무런 아름다움도 없었음을 우리는 잊지 맙시다.
히브리어에 의하면 지구는 "토후와 보후"(tohu and bohu)입니다. 나는 이 두 말을 그 의미와 발음에 있어서 동시에 유사하도록 만들기 위해 "그럭저럭 될대로 엉망진창"(anyhow and nohow)으로 번역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구는 혼란, 공허, 폐허였습니다. 조화를 이루지도 못하고 유기적으로 조직되지도 못한 물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눈을 빛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눈을 혼란에 두지는 아니하셨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이 체험한 것도 하나의 혼돈일지도 모릅니다. 즉 여러분이 체험한 것도 그럭저럭 될대로 되어버린 엉망진창이며, 마땅히 정상 위치를 지니고 있어야 할 상태를 지키지 못한 그런 처지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체험이란 것은 기껏해야 불완전한 개념들의 집합이요, 되지 못한 욕망이요, 잘못된 기도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안에 은혜가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무서운 혼란이 있고 영혼의 거창한 울부짖음이 있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오직 여러분 속에 깃든 은혜를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안에 친히 창조해 두신 것을 바라보시고 고려하시며 즐기고 계신답니다. 그리고 여러분 안에 들어있는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귀한 아드님의 속죄행위로 말미암아 보시지 않으시고 덮어버리십니다.
또 기억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빛이 왔었을 때 그 빛은 어둠과 싸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둠을 없는 양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영혼 속에도 아직까지 타고난 부패, 무지, 약점, 죄를 짓는 경향성 등의 어두움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싸움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그 가운데서 빛을 보고 계십니다.
자, 우리 하나님께서 어두움에 그 시선을 두시기보다는, 오히려 빛에 시선을 두고 계신다는 이 사실이야말로 얼마나 위대한 자비입니까!
이 사실로 인해 나는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있는 빛이 미약하다는 이유로 그 빛을 무시해 버리고, 우리 가운데 있는 죄가 너무도 심하다는 이유로 그 죄에만 시선을 두고 꿰뚫어보시기만 하신다면, 그땐 하나님께서 우리를 전적으로 박살내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뒤로 던져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신생의 은혜에 시선을 계속 두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 주 하나님이 그 신생의 은혜를 보존하노라. 나는 그 은혜를 매 순간 물주며 키우노라. 아무도 이 은혜를 상치 못하도록 나는 밤낮 그 은혜를 지키겠노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보신 이유는 많이 있습니다마는, 특별히 빛을 보신 이유는 하나님이 빛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손으로 하신 업적을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나는 볼 수 없지만 인간들 속에 있는 은혜를 보고 계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영혼 안에 은혜를 가만히 넣어 두셨던 관계로, 어디에 그 은혜가 있는지를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지 아니했더라면 한 가닥의 은혜도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은혜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을"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소리를 들으시고 그 소리가 나오는 방향으로 눈을 돌리십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친 자녀들을 아십니다. 하나님의 눈과 마음은 계속해서 그의 자녀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이 친히 만드신 빛을 아십니다. 이 우주에는 한줄기의 빗나간 광선도 없으며, 한줄기의 빛이라도 결코 잊혀진 채 버려진 것은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잊혀진 은혜라고는 조금도 없으며, 이탈된 구원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은혜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은혜를 주시는 일은 하나님 마음에 그토록 귀중히 여기는 역사이며, 그 역사의 효과는 너무도 귀하게 평가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말해 온 것을 요약해 드린다면 요는 이런 것이 되겠습니다. 하나님을 믿어 하나님께로 돌아온 여러분이건만, 여러분의 영혼 속에는 아직도 무엇인가 안정이 되어 있지 못하고, 모든 것이 동요하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슬퍼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충분한 열매를 맺을 만큼 오랫동안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분의 생활 속에는 성장도 없고, 열매도 없고, 아름다운 미덕도 없음을 혹 지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염려 마십시오. 여러분 속에 여러분의 유일한 소망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계시해 주기에 충분한 빛이 진정 있을진대 기운을 내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첫날에서 창조의 제4일에 있었던 업적을 보시려는 하나님은 결단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친히 주시고 만드신 것을 여러분 속에 두시고 그것을 보시면서 좋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속에 있는 빛을 보시고 그 빛을 영원히 유지하십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어두운데 다니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빛을 증가하셔서 영광이 여러분 위에 내려붓도록 하십니다. 여러분은 죄를 회개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빛을 보십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약점을 슬퍼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빛을 보셨습니다. 여러분은 기도하시기 시작하십니까?
"보라, 저가 기도하는구나"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빛만 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비록 떨리는 믿음을 가지고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하나님은 빛을 보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비에다가 소망을 두기 시작하십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의 그 소망을 보십니다. 여러분에게 빛을 주신 하나님은 그 빛을 계속보고 계십니다.
Ⅱ. 자, 이제 우리는 제2대지로 넘어가 봅시다. 제2대지는 이것이니, 곧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인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은 빛을 즐기셨습니다. 이 세상의 관점으로 보아 그 빛은 다만 어리고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혹 여러분들 가운데 어떤 분에게는 은혜가 아주 신기한 것이 되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바로 조금 전이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단련하거나 또는 여러분의 받은바 은혜를 발전시킬 기회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이제 갓 난 생명을 마냥 기뻐하고 계십니다. 혹 이미 믿은 지 오래된 사람들은 은혜의 여명을 의심하고, 새 신자를 매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마는, 그들은 진정 하나님의 심정을 품고 있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교회에 오래전부터 나와서 믿었다고 하는 연조 깊은 교인들이 지금부터 20년 전에 곧장 잘하던 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새로 갓 믿은 신자를 너무 성급하게 교회회원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들이 세례를 받기에 앞서 그들로 하여금 여름도 지나고 겨울도 지나보도록 해야 한다"는 따위의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어린양을 일단 먼저 양우리에 넣기 이전에, 그 양들로 하여금 뜨거운 여름도 추운 겨울도 밖에서 지내도록 방치해 두어야만 한다고, 소위 신중을 기하는 농부들에 대해서는,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나는 궁금할 뿐입니다. 또는 어린 자녀들을 일단 먼저 부모의 가슴에 품기 이전에, 밖에서 여름도 지나고 겨울도 지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중을 기하는 부모에 대해서는, 또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나는 궁금할 뿐입니다.
우리는 어린 신자들을 은혜 속에 간직하고, 그 어린 신자들을 하나님을 위해 보호하기를 마땅히 기뻐해야 합니다. 결코 그들이 어리다고 해서 무시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하나님은 수년에 걸친 시련을 지난 후에 빛을 두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바로 창조의 첫날에 빛을 두시고, 또 그것을 보고 마냥 기뻐하셨으며 좋으시다고 선포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그 빛을 마치 세대 이전에 만드셨던 것처럼, 참으로 그 빛은 선하고, 참으로 하나님 자신의 창조물이었기 때문에 그 빛을 좋아하셨던 것입니다. 빛은 정오에는 물론 새벽에도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비록 이제 처음으로 받은 것이라해도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여러분을 위해 점차 보다 더 큰 일을 해 낼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보다 행복하고 보다 거룩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 할지라도 모든 탁월한 미덕의 요소가 그 은혜 안에 있습니다. 창조의 첫날에 그 빛 위에 하나님의 축복이 내려진 것입니다. 비록 새싹에 깃든 은혜라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자, 이 진리를 새로 믿는 초신자에게 넣어주어 그들의 기쁨을 듬뿍 안겨 줍시다.
여기 우리가 또 언급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이 빛은 싸움하고 있는 빛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이 인정하신 사실입니다. 성경 구절이 말하고 있는 대로 하나님께서 빛과 어두움을 나누시기까지, 빛과 어두움이 어떻게 함께 존재해 있었을까 하는 문제는,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 번연이 말한 것처럼 "틀림없이 어두움과 빛은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빛이 도대체 어두움과 무슨 교제가 있겠습니까?
흑암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빛의 화살이 흑암을 뚫고 들어왔습니다. 암흑은 제자리를 지키려고 무진 애를 썼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에 "어두움은 지나가고 참빛이 이제 비치는구나"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여러분은 빛이 여러분 속의 조그마한 세계에 침투했을 때에 그 정경이 어떠했는지 지금 기억하고 있습니까?
내 경우에는 내적 투쟁과 무서운 갈등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격렬한 투쟁이었는지요!
얼마나 놀라운 경쟁이었는지요!
처음 빛이 밤을 꿰뚫고 들어올 때에 나의 영혼은 얼마나 격렬한 갈등을 감수해야 했는지 모른답니다. 나의 이 어두운 마음은 빛을 반항했습니다. 그것은 그 어두운 마음의 소행이 드러나서 책망 받을까 두려워한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빛은 한사코 들어왔으며 돌아가지 아니했습니다. 오직 그 빛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계속 뚫고 들어왔습니다. 마침내 내가 "너희가 한때는 어두움이었더니 이제는 하나님 안에 있는 빛이라"(엡5:8)는 말을 듣게 되는 무리에 속할 때까지 그 빛은 나에게 뚫고 들어옵니다.
내 형제들이여, 여러분들도 이런 투쟁에 대해서 전연 무지한 사람들은 아님을 나는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런 투쟁이 여러분에게는 그저 과거에 있었던 지난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나는 확신합니다. 아니, 지금도 여러분은 그런 투쟁의 과정에 있습니다. 아직도 은혜와 죄가 여러분 안에서 싸우고 있는 중입니다. 여러분이 천국에 이르기까지 계속 그럴 것입니다.
오, 당황하고 있는 그대여, 그 빛은 비록 지금 투쟁하고 있는 빛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빛을 인정해 주시고, 또 그 빛을 선하시다고 부르시는 사실을 기억하고 기운을 내시기 바랍니다. 만족스럽지 못한 회개라도 그 회개는 선한 것입니다. 만족스럽지 못한 믿음이라도 그 믿음은 선한 것입니다. 축축한 나무에 붙은 불처럼 비록 시름없이 타고 있는 생명이라도 그 생명은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다 인정하시고 평가하십니다. 그러기에 무어라고 말했습니까?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신다(사42:3)고 했습니다.
아직 빛이 어두움에서 분리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낮과 밤의 경계가 확정되지 아니했습니다.
어린 초신자에게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어느 것이 은혜며, 어느 것이 육이며, 자기 자신들에게 속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은 무엇인지 좀처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큰 과오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과오를 저지르는 일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 안에 넣어둔 것을 다 인정해주십니다. 초신자들은 거의 식별력이 없기 때문에 아는 것도 있고 모르는 것도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걸어 다니는 나무로 봅니다마는,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이 무엇인지 너무도 명백하게 아십니다. 초신자들에게는 밤도 낮도 없습니다. 그들은 안개 속에 묻혀 있습니다. 그리고 식별할 능력도 결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초신자들을 알아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속하는 사람들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상태를 다 분석하시고, 또 그들 속에 넣어 두신 빛이 무엇인지 아시고, 그것을 인정하신다는 사실로 그들의 기쁨을 삼도록 합시다.
아직 빛과 어두움이 이름을 갖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낮"이라 부르고 어두움을 "밤"이라 부르신 것은 그 후에 된 일입니다. 하나님은 빛을 보시고 좋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비록 사물의 이름을 모르고 있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의 이름을 아십니다. 여러분은 사물을 정확하게 언급할 교리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을 이해하십니다. 여러분이 용어와 이름에 무지하고, 정신에 혼란을 일으키고 어린이처럼 오해하는 바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 이룩해 놓으신 은혜를 무시해 버리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은 보다 더 좋은 사물과 보다 나쁜 다른 사물은 한층 더 재빨리 구분해내는 데 그칩니다마는,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이나 척척 구분해 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넣어 두신 빛을 마냥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사랑하지 아니했던 은혜란 결코 만들지 아니하셨으며, 또 인정하지 아니했던 역사란 인간의 영혼 안에 결코 만들어 두시지는 아니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 하신 일은 다 사랑하고 인정했던 것이기에 행하신 것입니다.
창조의 첫날에 빛은 아름다움에 관해 많이 계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친구여, 이것은 여러분에게도 역시 한가지입니다. 안에 있는 빛이 여러분에게 계시해 준 것이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 빛이 계시한 것이란 그리 대단치 않습니다. 그러나 그 빛이 나타내고 있는 대상이야 무엇이든 간에 그 빛 자체가 선한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젊은 친구여, 여러분에게 주어진 은혜가 여러분 성품의 타락성을 계시하거나, 또는 여러분 안에 불결한 새들의 새장을 다만 보여주거나, 또는 여러분 성품 안에서 격노하고 고함을 치고 있는 야수들을 보여주거나, 혹은 이런 야수들의 지배가 곧 끝날 것을 알고, 그 언제보다도 더 격렬하게 우리에게 으르렁거리도록 만들기만 한다할지라도, 역시 빛은 빛입니다. 빛이 여러분의 성품이 따분한 소동과 파괴된 무질서 주위를 맴돌고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할지라도, 빛은 선하며, 하나님은 그 빛을 기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눈길을 이끌만한 육지와 바다, 산과 호수, 목장과 숲 등의 다양한 아름다운 경치도 없건만, 하나님은 모양 없는 물체 위에 비추던 빛만은 인정하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친히 여러분 안에 만들어 놓으신 은혜가 어떠한 것이든지, 하나님이 그것을 인정하셨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받아들임으로써, 이제 위로를 삼고 격려를 얻으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왜 하나님은 빛을 좋으시다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빛의 창조가 하나님의 속성을 계시한 때문이겠습니다.
빛이 순간적으로 왔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절대주권,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사랑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영광이 어두움에 있을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옷을 입듯이 빛으로 자기를 덮으시도다"고 했습니다. 은혜는 한층 더 영광스럽게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낸 것입니다. 은혜 안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십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은혜만 가지고도 여러분은 충분히 하나님의 능력과 공의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관해 알고도 남습니다. 하늘에서 온 천사까지도 하나님의 역사로 여러분 안에 이룩하신 동일한 거룩한 하나님의 속성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은혜를 사랑하십니다. 그것은 은혜가 하나님의 수많은 영광스러운 속성을 드러내서 하나님을 알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빛을 사랑하십니다. 빛이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조금도 어두움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빛은 가벼운 공기입니다. 거의 영적입니다. 그러니까 영이신 하나님과 닮은 것입니다. 빛은 진리를 드러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진리의 하나님을 닮은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은혜가 만일 참으로 진정 은혜일진대, 그것은 보다 더 하나님의 성품에 가까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은혜는 살아있고 썩지 않는 씨로서, 여러분은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며, 정욕으로 좇아오는 이 세상의 썩어질 것에서 피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어두움의 권세의 임금입니다. 그러나 다른 원리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빛의 원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 안에 있습니다. 이 원리는 분명코 선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때문입니다.
빛은 특이하게 좋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이 빛을 만드시고 정리하는 데에 온 하루 전체를 바쳤던 것입니다.
창조에 소요된 총 6일 가운데 온전히 하루를 빛 창조에 할애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빛이 지극히 중요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빛을 창조하시되 창조의 첫날에 만드신 것이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은혜의 계획도 하나님의 심중에는 일찍부터 있었던 일입니다. 은혜의 계획은 과거에 있었던 것인데 지금 나타난 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걸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결코 뒷전에 방치해 두시지는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가 이미 예부터 이 은혜를 고안했으며, 동일한 그 지혜가 이 긴긴 은혜의 날을 시종일관해서 항상 은혜를 두고 생각했습니다. 그런즉 이제 여러분 안에 있는 적은 은혜도 다 하나님이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 은혜는 예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생각의 열매올시다. 이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 새 창조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빛은 때를 맞추어 나온 적시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정하신 것으로 봅니다.
이 빛은 모든 창조에 앞서 제일 먼저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빛이 제일 먼저 있어야 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어두운데서는 아무것도 일하실 수 없어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연적인 빛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하나님에게는 어두움과 빛이 둘 다 동일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로 만든 작품들이 빛을 필요로 하고 있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식물이나 동물이나 인간이나 빛이 없이 어떻게 살아낼 수가 있단 말입니까?
분명히 하나님의 성령님의 거룩하게 하시는 역사는 인간 영혼 안에 빛을 필요로 합니다. 인간의 영혼은 이해를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종교는 무지 가운데서는 빛을 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관해 다소라도 알기 이전에는 은혜란 조금도 꽃필 수가 없는 법입니다. 성령님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새로 창조하실 때에 관심을 두신 제일 기본적인 요소는, 인간의 영혼에 지식과 거룩에 대해 비쳐주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신 목적은 인간으로 하여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을 알라고 한 것입니다. 그토록 빛이 근본적인 것이기에 하나님은 그것을 좋으시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자,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역사를 마냥 기뻐하셨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으며, 또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뻐하셨는가 라는 이유를 여러분들에게 제시해 왔습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아직도 떨고 있는 초신자들에게 가르쳐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이룩하신 은혜를 인정하실진대, 또한 그 은혜를 계속 보존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불타게 하신 빛이 세상과 육이나 악에 의해 곧 꺼져갈 듯 한 곤경을 당해도 조금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 빛을 더 발전시켜 나가실 뿐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조그마한 불빛이라도 더 완전한 날을 향해 비추도록 조정하십니다. 내가 하나님께 비는 것은 비록 불쌍하게 괴로움을 당하고 계시는 분이라도 이상의 생각을 갖도록 해 달라는 간구올시다. 그러한 생각이야 말로 내 자신에게 넘치는 위로가 되었던 때를 나는 잘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자신을 오래된 성도와 한번 비교해 볼 때에, 내 안에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거의 없는 것 같아서 두렵기만 합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사실을 알고 기뻐하던 것처럼, 만일 하나님의 역사가 비록 처음부터 하나님에 의해 인정을 받았다는 것과, 하나님은 영혼 안에 있는 은혜의 요소를 지극히 만족스럽게 주목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내가 진작 알고 있었더라면, 내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기뻐했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바입니다. 나는 어린 양떼들인 여러분들이 이 부드러운 풀을 배불리 잡수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초년 생활에 적합한 맛있는 음식이올시다.
작은 양무리여,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위대한 목자께서 여러분들을 인해 마냥 기뻐하고 계신답니다.
Ⅲ. 지금 세 번째로 여러분에게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 가운데 존재하는 모든 선하심과 아름다움을 재빨리 식별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지금은 이해가 되지 않을지 모르나 앞으로는 이해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해가 되지 않으나 나중에는 이해될 그 사상만은 역시 동일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빛을 승인하신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빛을 승인하실 만한 이유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빛을 보시니 좋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타 어느 누구도 볼 수 없었던 가운데서도 선하심을 볼 수 있었습니다.
빛은 그 자체가 선하다는 사실을 먼저 밝혀둡시다.
하나님의 은혜도 역시 그렇습니다. 빛이란 과연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어디 빛을 두고 한번 생각해 봅시다!
빛처럼 간단한 것이 어디 있으며, 그러면서도 빛처럼 복잡한 것도 또 어디 있습니까!
빛을 연구하는 학도들도 빛의 여러 성질에 대해 10분의 1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빛의 성질에 대해 많은 기적들이 생겨났습니다마는, 아직도 미해결로 남아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즐기고 있는 단순한 흰 빛 하나를 만들기에 내부에서 조합된 색채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나 계십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은혜도 간단합니다마는 그래도 복잡합니다. 갖가지 은혜가 있습니다. 생명을 깨우치는 은혜, 죄를 깨닫게 하는 은혜, 위로하는 은혜, 가르치는 은혜, 지켜주는 은혜, 거룩하게 하는 은혜, 완전케 하는 은혜 등이 있습니다. 이런 은혜는 심히 간단한 것입니다마는 그 작용은 얼마나 다양한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충만하게 하신 "모든 은혜"는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요!
우리가 은혜 안에서 찾고 있는 3중적인 은혜의 광선을 어디 한번 생각해 봅시다. 선택해 주시던 아버지의 은혜, 구속해 주시는 아드님의 은혜, 중생케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양한 은혜를 생각하고 찬양하고 감사합시다.
그러나 빛은 또한 얼마나 평범한 것입니까?
우리는 어디서나 빛을 봅니다. 그리고 일 년 내내 빛을 봅니다. 제아무리 포악한 독재자라도 자기 혼자만 가지겠다고 빛을 가두어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비천한 거지라도 당당히 빛을 받아 가집니다. 어느 누구도 빛을 독점할 수는 없습니다. 빛은 누구에게나 공히 기쁘게 방문합니다. 그와 같이 성경도 하나님의 은혜의 값없이 분배함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경험상으로 보아도 하나님의 은혜는 비록 아무리 비천하고, 아무리 수수한 사람에게도 비쳐줍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들에게도 깨우쳐줍니다. 그러나 이 빛이야말로 얼마나 값진 것입니까?
눈을 감은 장님들은 빛을 보지 못합니다. 여러분이나 내가 만일 무덤 속에 갇혀 있다면, 하늘의 빛을 보고 걸어보자고 얼마나 갈구했겠습니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것은 그 은혜를 받아들일 눈이 있는 사람에게만 개방된 것입니다.
빛은 또한 얼마나 나약하면서도 또 얼마나 강한 것인지 모릅니다!
빛이 발하는 광선은 거미집만큼도 우리를 강하게 붙들어 놓지 못합니다마는, 광선이야말로 얼마나 강력하고 얼마나 특이한 것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우주 가운데서 빛보다 더 잠재 능력을 가진 세력은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습니다마는, 그 안에 위대한 잠재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정복자보다도 더 위대합니다. 이미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빛은 소리 없이 조용합니다. 여러분들은 빛의 발자국 소리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빛이야말로 얼마나 생생한 효력을 내는지 모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는 눈에 뜨이지 않게 왔습니다마는, 그것의 변화하는 역사는 비길 데 없이 위대합니다. 빛은 또한 다양하게 내려 봅니다. 우리는 빛을 어디에서도 보거니와 여러 다른 매개체를 통해서 봅니다. 그러나 빛은 얼마나 일정한지 모릅니다. 빛은 얼마나 일정하게 선한지 모릅니다!
은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들어와서 여러 가지 다양하게 역사합니다. 그러나 그 은혜는 언제나 동일하며 그 결과는 항상 순수하고 사랑스러우며, 좋은 명성을 지닙니다. 빛이 좋으시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누구가 이 빛을 그렇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누가 빛을 정의할 수 있겠습니까?
태양 빛은 더러운 잿더미 위에도 내립니다마는, 그것의 순결성은 장미꽃처럼 흰 눈 위에 내린듯이 유지됩니다. 누구가 빛의 아름다움을 탈취할 수 있겠습니까?
빛은 저 냄새나고 구역질나는 어둠컴컴한 토굴 속까지라도 꿰뚫어 비치고 있지만, 빛이 지닌 우월성은 조금도 퇴색되지 않은 채 유지됩니다. 빛은 어두움에 들어간다고 해서 결코 소란을 피우지도 않으며, 침울한 속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부패되지도 않습니다. 나무에 붙은 잎사귀들은 가을 기운에 누렇게 단풍으로 물들어 땅에 떨어져 썩고 말지만, 빛의 광선은 시드는 일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무수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마는, 빛은 언제나 한결같고, 빛의 싱싱한 영광은 항상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싱싱한 광선이 중심에서부터 뛰어나와 피곤치 않은 날개를 가지고 우리를 방문해서, 땅의 소생의 싱싱함으로 마냥 감탄을 받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려 보십시오. 그리하면 모두 중요한 것으로 강조될 것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는 약화되지 않습니다. 은혜는 언제나 순결하고 선합니다. 은혜는 부패하는 법도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씨앗입니다. 이 씨앗은 영원히 살아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오, 귀한 은혜여, 그대가 인간의 영혼에 있을진대, 또 그대가 창조의 첫날에 있는 것일진대, 은혜 그대는 선한 것이로다.
빛은 그 자체에 있어서 선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전투에 있어서도 선합니다.
빛은 어둠과 투쟁했습니다. 어두움이 빛과 싸움을 하게 된 것은 빛이 선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젊은 친구여, 은혜가 당신에게 왔습니다. 그 은혜가 당신의 죄와 싸웁니다. 죄는 싸움을 해서 마땅히 정복당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빛은 그 정도에 있어서 선합니다.
빛이 너무 많지도 아니했고 너무 적지도 아니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세상에다가 좀 과다한 빛을 주셨더라면 우리 모두는 다 장님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또 만일 하나님께서 너무나 적은 양의 빛을 주셨다면, 우리는 어둠컴컴한데서 더듬는 신세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막 새로 출생한 그리스도인에게 그가 감당해 낼 수 있는 양만큼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과분하게 수년이나 성장한 뒤에 줄 은혜를 당장에 내려주시지는 아니했습니다. 그렇게 주셨더라면 그 은혜를 그대로 지킬 수가 없을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16:12)고 예수님이 말씀하시지 아니 하셨습니까?
새벽은 정오만큼이나 좋은 것입니다. 은혜 안에 깃든 어린 아이는 마냥 예쁩니다. 또 그 어린 아이 속에 든 은혜는 그의 상태에 알맞은 정도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은혜 안에 깃든 어린 아이가 온전하게 성장한 사람이 지닌 빛과 은혜를 가지지 못했다는 이유로 함부로 판단하지는 마시오. 그런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닙니다.
빛은 하나님의 다른 사역을 위한 하나의 준비로서 선한 것입니다.
위대하신 창조주는 식물을 만드시려 했습니다. 그런데 식물들이 빛이 없고야 무엇을 했겠습니까?
하나님은 궁창에 날 새를 곧 만드실 것과 목장에서 풀을 뜯을 짐승을 곧 만드실 것을 아셨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빛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빛을 비록 최초에 있게 하셨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완성하는 데에 필수적임을 아셨습니다. 인간의 눈이 하나님의 역사를 즐기기 위해서도 빛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이 다른 것과 마땅히 맺어야 할 관계에서 보아 빛을 보시고 선하시다 하신 것입니다.
오, 이제 나는 어린 초신자를 다루실 여러분에게 촉구하는 바 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린 초신자들이 갖고 있는 은혜가 장차 어떤 것이 될 것인가를 생각하시면서, 그들의 은혜를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초신자들이 지닌 은혜가 단지 연약한 푸른 풀잎 정도로 연약한 것이라고 무시하면서 보아 넘기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가느다란 뿌리에서 앞으로 돋아날 귀중한 새싹을 바라볼 줄 아는 신앙의 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제발, 도토리 속에 든 도토리나무를 보시고, 어린이 속에 든 어른을 보시고, 그것들을 모두 좋은 것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사람들이 빛의 선함과 은혜의 선함이라는 이 하나의 귀중한 진리로부터 그것의 결과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생각을 이끌어낼지도 모르겠습니다.
빛은 세상을 장식할 아름다움을 내었습니다.
빛이 없었더라면 세상은 속절없이 암흑뿐입니다.
빛의 연필이 모든 것을 그립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격의 모든 아름다움은 모두 은혜의 결과올시다.
빛은 생명을 유지합니다. 이 빛이 없었더라면 적시에 나온 생명이라도 시들어 결국은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은혜만이 믿는 자의 미덕과 은혜들을 유지해 줍니다. 일상적인 은혜가 없으면 우리는 영적으로 죽게 마련입니다.
빛은 많은 질병을 치료합니다. 은혜는 치료하는 날개를 가지고 옵니다. 빛은 위로요, 빛은 기쁨입니다. 암흑에 처한 죄수까지도 빛이 과연 그러함을 압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도 그것이 어디에 쏟아지든 기쁨과 평안을 냅니다.
빛은 계시합니다. 은혜는 역시 계시합니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빛 되신 하나님 안에 행한다는 것은 빛 안에 있는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자는 것입니다.
오, 주시여,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시43:3)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빛 안에서 보이지 않은 많은 선한 것을 알고 계셨으며, 이제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인간 영혼에 둔 은혜의 첫 사역 안에서도 많은 선한 것을 또한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 영혼에 둔 은혜의 첫 사역에 든 많은 선한 것에 대해서는 영혼 자체도 전연 모르며, 또 제법 관찰력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친절한 눈길을 가지고 본다 해도 능히 탐색해 낼 수 없는 것인데,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다 알고 계심을 이제 여러분이 비로소 아시게 되었습니다.
Ⅳ. 이제 우리는 실제적인 관찰을 가지고 결론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실제적인 관찰이란 하나님께서 창조의 첫날의 작품의 평가를 기록해 두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 하나님의 판단이 공개되어 있습니다.
"그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기록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나는 초신자들에게 하나님은 여러분을 격려하십니다 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믿은 이래로 계속 여러분 자신을 주시해 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아 참, 나는 추잡한 놈이로구나. 나는 도대체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도무지 모른단 말이야"라고 낙담하며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아니, 여러분은 지금도 여러분 안에 있는 것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저 알 수 있다는 것은 "나는 지독하게 나쁜 사람이다"라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확신시켜 주거니와 여러분은 여러분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몹쓸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은 "선생님, 이 무슨 말씀입니까? 나를 또 실망케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나는 지금 실망하고 있습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옳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진정 여러분 자신에 대해 모든 진상을 보시게 된다면, 여러분이 스스로 실망하는 정도는 무려 10배나 더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너무도 악한 사람이라서 소망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잘 하는 일입니다. 나는 나의 옛 성품은 죽었으며 부패했기 때문에, 이젠 아무 것도 나를 놀라게 할 것이란 없음을 하나님이 나에게 명백하게 가르쳐 주신데 대해서 자주 감사를 올리곤 합니다. 나는 일전 한 푼 없는 파산 선고자로 시작했기 때문에, 이제 더 가난해질 라야 질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아니한 벌거숭이이니, 결코 더 이상 잃어버릴 걸레 조각 하나도 없답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철저하게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상실할 힘마저 없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육 안에는 아무런 선한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아는 일이 필수적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
먼저 이 말씀을 착념하십시오. 이것을 확정된 사실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하면 그 후에 여러분을 놀라게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성품은 선도될 수도 없고 치료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속에는 하나님이 넣어두신 은혜로운 빛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빛을 인해서 마냥 여러분을 기뻐하십니다. 여러분이 불과 일주일 전에 하나님의 가족으로 출생한 어린 아이로서, 아직도 요람에서 울고 있다 하더라도, 여러분의 하늘 아버지는 여러분을 사랑하시며, 여러분에게 주신 은혜로 많은 것을 쌓아 놓으십니다. 그런즉,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신앙을 선하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에게 대해 가지고 있는 작은 사랑이라도 선하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상 그것을 끝까지 완성해 나가실 것을 믿고 나는 격려를 받노라"고 말입니다.
나는 연조 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지막으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첫날의 창조가 선하다고 말씀하신 이상, 이미 오래 전부터 믿은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그런 사실을 초신자들에게 말해 주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여러분들은 처음 믿은 사람에게 신뢰를 두고 그에게 교제를 나누기에 앞서 제2, 제3, 제4, 제5, 제6일까지 기다리지는 마시라는 부탁을 드리는 바입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일찍 격려의 말씀을 드렸을진대, 나도 여러분께서 그렇게 초신자에게 지체 없이 격려의 말씀을 던져 주시기 바랍니다. 어린 초신자에게 던진 몇 마디 말이 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유익된 말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약점으로 인해 그는 그런 격려의 말을 갈구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주의 길에 들어서서 살아온 우리라 하더라도 난폭하고 까다로우며, 비판적이기만 하다면 마땅히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왔다"(눅15:30)고 말한 사람은 젊은 형제가 한 말이 아니라 나이든 형님이 한 말임은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십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형님의 생각으로 기울어지지 말 것을 위해 기도하는 바입니다. 여러분은 해가 흐를수록 나이가 들어야 되겠지만, 마음은 항상 젊게 있어야 합니다. 이제 갓 믿은 초신자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추구하거나, 그들에게서 우리가 기대할 그 이상으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들을 비판한다고 유익을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격려함으로 크게 유익을 끼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번 주 신문에서 웨브 선장이 해협을 횡단해서 헤엄쳐 나온 기사를 읽었습니다.
우리가 거기서 본 것은 매순간 그의 친구들이 그에게 격려를 보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격려가 그에게 힘이 되지 않았을까요? 분명히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허약하고 기진맥진한 사람에게 격려만큼 귀한 것은 없습니다. 약한 형제에게 격려를 아끼지 마시기 바랍니다. 방황하고 있는 초신자를 만나신다면 그에게 격려를 보내주십시오. 그에게 뜨거운 격려를 부어 주십시오.
그에게 어떤 선택의 약속을 말해 주시고, 또 하나님께서 어떻게 여러분을 도와주셨던 가의 체험담을 말해 주십시오. 여러분이 내어 놓은 몇 마디 말이 여러분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나, 지금 방황하고 있는 초신자에게는 굉장한 말이 될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아마 여러분이 진정 뜻하는 바는 그것이 아니겠지만, 외모로 드러내 보인 우울한 표정은, 초신자로 하여금 골수를 서늘케 만들 것입니다. 엄격한 교수의 그 차디 찬 냉담 때문에 빳빳이 얼어붙은 동상의 피해를 입은 어린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자, 이제 우리는 초신자를 격려하고 돕는 것을 상례로 삼읍시다. 격려하는 일은 어린 초신자들의 장래의 역사의 전부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첫날에 만드신 것을 선하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하여 결국 하나님께 "심히 좋았더라"(창1:31)고 선언하시기까지 이릅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초신자들에게 있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좋게 될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친히 초신자들에게 하나의 전달 수단이 되어 전해주던 그 최초의 축복이 마침내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마25:21)라는 말로 압축된 수천가지 찬사 중의 제일의 찬사가 될 것입니다.
하여간, 사랑하는 형제여, 만일 여러분이 이렇게만 한다면, 이로 인해서 여러분 안에도 하나님과 같은 성질이 있음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첫날의 역사를 좋으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처럼 비록 첫날에 된 것이 아무리 적다할지라도 거기서 선함을 보고, 또 그것을 찬양할 준비태세를 갖추시기 바랍니다.
은혜의 처음 미미한 역사일망정 그것에 찬사를 보낸다는 것은 그렇게 하는 여러분 자신의 위로를 위하는 것이 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초신자나 오래된 신자에게서 선한 것을 탐색해 내는 눈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축복된 기능이올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결점만 잡아내는 데에 예민한 눈을 가진 사람은 비참한 존재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태양을 쳐다보고도 "태양에 흠점이 있구나"라고 말합니다. 달을 쳐다보고서도 달빛이 창백하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물을 보기보다는 차라리 앞 못 보는 장님이 되는 것이 더 낫겠지요. 여러분 가운데는 이런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빛을 보시고 좋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그렇게 빛을 바라보시고 그 빛을 즐기시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약한 은혜의 편에 서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 자신의 은혜는 더 강하게 성장할 것입니다. 연약한 심정을 가진 자를 위로하고 약한 자를 도우며, 모든 사람에게 인내로 대하십시오. 그리고 거룩한 사랑을 가지고 약한 것은 잊어버리시고 다만 진리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설교자
스펄전
‘설교의 황태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찰스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1834.6.19-1892.1.31)은 영국 역사상 가장 화려한 시기인 빅토리아시대에 활동한 설교자였다.
2020년 11월 23일

